1921년 5월 7일 慶尙北道 星州郡의 檜淵書堂 유림이 義士 李士龍 추모를 위한 契를 결성하면서, 다른 유림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21년 5월 7일 慶尙北道 星州郡의 檜淵書堂 유림 堂長 李德厚, 班首 鄭恩錫, 營將 崔銀東, 參奉 李基轍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檜淵書堂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당시 성주군의 유림들은 회연서당에 모여, 옛 星州牧 출신의 義士 李士龍[1595~1641]을 추모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고, 그 결과 契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더 많은 유림들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하여, 본 통문을 도내 여러 고을에 발급하였던 것이다.
「檜淵書堂來文」은 크게 의사 이사룡의 행적을 설명한 부분과 계의 결성 경위를 밝히고 참여를 촉구하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통문 전반부에는 이사룡의 행적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 서두에는 『中庸』에서 孔子가 말한 "서슬 퍼런 칼날을 밟을 수는 있어도 중용을 잘하기에는 불가능하다(白刀可蹈也 中庸不可能也)"라는 구절과 이것에 대한 朱子의 주석을 수록해 놓았다. 이사룡이야 말로 殺身成仁의 자세로 중용에 합치된 인물임을 전제한 것인데, 통문에 소개된 이사룡의 행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사룡이 御營廳에 소속되어 있었던 1640년(인조 18)에 胡虜, 즉 淸나라가 明나라를 공격하고자 파병을 요청해 왔다. 이 시기는 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의 강한 외교·군사적 압박을 받던 시기였다. 이사룡도 이때 砲手로 편재되어 파병되었다. 이에 이사룡은 비분강개하며 아내에게 어머니를 잘 봉양해 달라고 말했으며, 나라에서 보내온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파병된 이사룡은 錦州衛 전투에 투입되었다. 조선군은 청나라 군을 도와 명나라 군과 대치하였는데, 이사룡은 포수로 있으면서 총을 쏘지 않았다. 사격 지시가 있었지만 입으로만 총소리를 내고, 고의로 발포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청나라 장수한테 발각되었는데, 이사룡은 오랑캐의 나라를 도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명나라를 공격할 순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尊周의 의리를 내세운 것이다. 이에 청나라 장수는 이사룡을 설득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회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처형시켜 버렸다. 당시 청나라 군과 대적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는 이 소식을 듣고 이사룡에게 旌表를 내렸다고 한다. 이사룡의 시신은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昭顯世子에게로 보내졌는데, 소현세자는 귀국 할 때 직접 시신을 운구해 왔다. 이처럼 이사룡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명나라 萬曆皇帝에 대한 의리와 南漢山城에서 치욕을 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금주위 전투에서 총을 쏘지 않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사룡의 행적과 절개를 소개한 후, 통문 후반부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계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먼저 朱子가 唐나라의 衛士를 표창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일반 선비들은 입으로만 春秋의 의리를 이야기하지만, 이사룡은 선비가 아님에도 이를 직접 행동으로 실현시킨 인물임을 칭송하였다. 그러면서 47세의 나이로 절개를 지키다 죽임을 당했던 이사룡의 추모시설이 지난 번 훼철되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추모 시설은 賜額 祠宇인 忠烈祠를 가리킨다. 충렬사는 이사룡의 절개를 기리기고자 성주 지역에 건립되었었는데,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 여러 유림들은 아직 이사룡의 紀實도 편찬하지 못한 상황에서, 추모 장소까지 없어져 버린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래서는 列聖朝께서 포장하던 遺典을 계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거기다 지금 세상에는 말세의 邪說들이 橫流하여 彛倫이 끊어진 상태이니, 이사룡의 정신을 더욱 숭봉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회연서당에서 여러 유림이 모임을 가졌고, 여기서 계를 결성하자는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며, 더 많은 유림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병자호란 이후 이른바 尊周大義에 입각한 大明義理는 일반 유학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존주대의는 공자가 제창한 것으로 제후의 나라가 천자의 나라를 높이는 의리를 뜻한다. 명·청 교체기 조선의 유학자에게 천자의 나라는 명나라며, 이 명나라를 위해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병해 준 명나라를 청나라의 공격으로부터 도와줘야 한다는 대명의리로 확대되었고, 이러한 관념은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에 향촌사회에서는 존주대의와 대명의리를 지킨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추숭하였다. 그런데 존주대의와 대명의리의 추숭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이루어졌다. 향촌사회의 보수적인 유림들은 급변하는 시세의 변화 속에 존주대의와 대명의리를 지켜 나감으로써,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본 통문에 언급된 이사룡에 대한 추숭도 그러한 활동 중 하나로 이해 할 수 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