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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69년 6월 29일 「합천소학당래문(陜川小學堂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69.2771-20180630.Y18503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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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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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소학당,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869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69년 6월 29일 「합천소학당래문(陜川小學堂來文)」
1869년(고종 6) 6월 29일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소학당(小學堂) 유림이 경상도 현풍현(玄風縣)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수급의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합천소학당래문(陜川小學堂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서 소학당 유림은 도동서원 측에 건물 중수에 대한 물력 지원을 요청해 놓았다. 소학당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젊은 시절 독서하던 한훤당(寒暄堂)의 옛 터에 건립되었지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철폐되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합천군 유림은 1869년 힘을 모아 소학당을 새로 중수하였는데, 재력이 부족하여 완전한 중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소학당 유림은 김굉필을 제향(祭享)하고 있는 도동서원에 본 통문을 보내어 물력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69년 6월 29일 慶尙道 陜川郡小學堂 유림이 건물 중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에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69년(고종 6) 6월 29일 慶尙道 陜川郡小學堂 유림 裵泰中·尹炳周·韓慶纘·曺■文·李明奎 등이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陜川小學堂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학당文敬公 金宏弼[1454~1504]이 젊은 시절 독서하던 寒暄堂을 다시 지은 것이다. 김굉필 사후 후학들이 소실된 한훤당 자리에 소학당을 짓고 김굉필을 추모하였는데,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 때 소학당도 함께 철폐되고 말았다. 이를 아쉬워 한 지역 유림이 1869소학당을 중수하였지만, 재력이 부족했던 관계로 도동서원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합천소학당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통문에서는 우리 고을 소학당문경공의 독서 장소였기 때문에, 鄕員들이 소학당을 尊慕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이유가 당연하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면서 문경공의 本孫도 같은 의미로 소학당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있으니, 또 어찌 더욱 향원에게 有別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번 서원이 철폐 될 때, 소학당이 잘못 섞여 들어가 함께 철폐되었으니, 이는 斯文이 厄會를 당한 것이고, 잘못된 人事임을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도동서원 측이 보낸 통문 가운데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다해 간쟁할 수 없으니, 엄하게 꾸짖어 달라"라고 언급한 구절을 상기시켜 놓았다. 흥선대원군1868년(고종 5) 소학당을 비롯해 전국의 未賜額 서원과 사우 등을 일괄적으로 철폐하였지만, 사액서원이었던 도동서원은 철폐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정상 같은 김굉필을 제향하고 있던 도동서원소학당의 철폐를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소학당 측은 양해의 표현이 들어간 통문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뒤 이어 요청할 지원의 명분을 전제하였던 것이다. 이어 통문에서는 수 백 년 修獲한 소학당이 철폐되어 잡풀의 마당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우리 고을에서 사림의 공론이 크게 일어나 重葺하는 거사를 모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비용이 방대하고 浮費도 많이 들어서, 本所 諸員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까닭에 鄕中에서 힘을 합쳐 재물을 모았으며, 이 재물로 1869년 4월 20일 始役해 지금에 이르러 공사가 일단락되었다며 중수 경위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이어 당시 容入한 자금이 대략 수 백 금이며, 소학당의 廊舍와 門垣은 미비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재력이 부족하여 완전하게 소학당을 중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통문 말미에는 도동서원소학당을 존숭하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니, 소학당 중수를 아무 관계없는 일로 보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지원해 줄 것을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제향 시설의 사회적 기능과 재지사족의 동향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제향 시설인 서원·사우·齋·影堂, 그리고 추모 기능을 가지고 있던 서당·누정 등은 재지사족의 향촌자치기구로 활용되었는데, 소학당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소학당을 비롯해 합천군의 많은 사적 제향 시설이 철폐되었다. 합천군 재지사족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제향 시설이 일시에 철폐되자,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담보할 새로운 출입처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 대안 가운데 하나가 講學의 성격이 강하였던 소학당의 중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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陜川小學堂來文【己巳六月二十九日裵泰中尹炳周韓慶纘曺■文李明奎等】
右文爲奉告事伏以鄙鄕之小學堂文敬公讀書
之所而鄕員之尊慕斯堂良有以也以文敬公本孫
言之其所以尊慕之者又豈不尤有別於鄕員哉今
此混入於毁撤係是斯文之一厄會而非人事之有
所歇后而然也向來貴通中以不能碎首力爭誅責
備至可知其忿憤之極有此非情之責然若使僉尊
參見於當場則亦未知有如何抵變之道耳第念累

百年修獲之堂不可永廢爲蓬蒿之場故鄙鄕士林
公議竣發謀所以重葺之擧而工役浩鉅浮費甚?
非若爾本所諸員所可句當故自鄕中合力鳩財始
役於四月念間今至斷手之境計其容入則合數百
餘金而廊舍與門垣之未備者尙多實有力不給之
難竊惟僉尊之於此堂尊慕之誠旣與鄙等無間則
其於此堂之役必不自外而視以秦瘠前通中?圖
修葺之敎鄙等業已謹奉行之矣工旣告成玆敢奉
告伏望僉尊?加優念以爲一臂之助如何告之者
鄙等之事也助之者僉尊同室之義也十分俯諒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