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7월 초1일 慶尙道 密陽都護府의 密陽鄕校 측이 『佔畢齋先生文集』 중간 과정에서 발생한 門人錄 문제와 관련하여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에 발급한 通文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74년(고종 11) 7월 초1일 慶尙道 密陽都護府의 密陽鄕校 유림 朴祥穆·孫學敎·安仁遠·李敏行·閔泳純·曺應奎 등이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密陽鄕校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은 『?畢齋先生文集』 중간 과정에서 추가된 門人錄이 논란을 일으키자, 밀양향교 측이 변론하기 위하여 발급한 것이다.
본 통문의 원인이 되는 『점필재선생문집』 중간본은 1869년(고종 6) 밀양도호부의 禮林書院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중간을 주도했던 인물은 金宗直[1431~1492]의 13대손 金埴[1807~1876]이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새롭게 추가된 문인록이었다. 이전에 간행된 문집과 비교해 문인 10명을 추가하며 모두 59명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金宏弼[1454~1504]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문인록 추가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중간 과정에서 공론을 구하지 않았으며, 김식이 금품을 수수하고 부당한 인물을 문인으로 추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굉필의 후손들과 그를 배향한 도동서원 측은 列邑에 통문을 보내어 문인록에 대한 辨破를 주장하였다. 밀양향교 측도 이 문제와 관련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밀양향교래문」을 변파 주장의 중심지였던 도동서원에 발급하였던 것이다.
「밀양향교래문」에서 밀양향교 측은 김식의 『점필재선생문집』 중간 문제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난처한 입장임을 군데군데 피력하며, 김식 문집 중간을 변론하고 있다. 특히 공론을 거치지 않고 문집을 중간했다는 것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변론하고 있는데, 문집 중간이 밀양도호부의 예림서원에서 진행된 관계로 밀양향교에서도 어떠한 입장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밀양향교 측은 당시 경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866년(고종 3) 겨울 김종직의 본손인 김식 노인이 중간하는 일을 고을에 두루 물었지만, 이때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유림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이 일을 차분히 살펴 볼 수 있는 경황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나, 김식의 老心에 심히 미안해서 흔쾌히 중간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갑자기 여러 각수들을 데리고 온 뒤 간행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發文하여 이 일은 우리 가문에서 오래 전부터 추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는 案件으로서 이제 가문에서 중간을 확정지었고, 또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校勘을 했으며, 재물을 모아 간행 경비를 마련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고을의 章甫들이 잘못된 字?을 고쳤다며 중간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문집의 중간 경위와 함께 덧붙여 문인록의 添錄은 우리 고을에서 이루어 진 수백 년 간의 公議이지, 김식 노인의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밀양향교 측은 중간 과정에서 분명 공의를 거쳤음을 변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와서 첨록된 문인록을 削正하자는 주장은 의리에 맞지 않으며,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자신들이 訝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 김식의 손자가 도동서원이 高靈縣에 보낸 통문을 가져와, 이를 보고 자신들이 이 일을 진행하게 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당시 고령현에는 김종직의 ?孫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앞서 이 문제와 관련해 도동서원 측이 김종직의 주손에게 문인록 변파를 건의하는 통문을 발급하였다. 이어 통문 말미에는 削正의 일은 본손의 일이지 다른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있는 일이 아니라며, 잘 살펴 주기를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문인집단의 師承關係과 조상추숭의식의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가 누구의 학문을 계승하였는가는 해당 인물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입장에서도 학문적 위상을 담보 받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후기가 되면 학자들끼리의 사승관계와 관련된 각종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 유형은 다양한데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사승 관계 여부, 嫡傳을 둘러 싼 경쟁, 그리고 본 통문에서 나타나는 문인록의 범위와 관련된 분쟁이 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학문적 위치를 확립하여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사회·경제적 변화로 향촌에서 재지사족의 지위가 약화되어가는 조선후기에 더욱 치열하게 일어났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