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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 7월 초1일 「밀양향교래문(密陽鄕校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74.2771-20180630.Y185030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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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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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밀양향교,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874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 7월 초1일 「밀양향교래문(密陽鄕校來文)」
1874년(고종 11) 7월 초1일 경상도(慶尙道)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 경상도 현풍현(玄風縣)도동서원(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측이 수급한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밀양향교래문(密陽鄕校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밀양향교래문」은 1869년(고종 6) 중간(重刊) 된 『점필재선생문집(?畢齋先生文集)』의 문인록(門人錄) 변파(辨破) 문제로 발급된 것이다. 『점필재선생문집』은 밀양도호부 출신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집인데, 1869년 그의 본손(本孫)인 김식(金埴)[1807~1876]이 밀양도호부 소재 예림서원(禮林書院)에서 중간하였다. 하지만 중간된 문집의 문인록에 김식이 공론을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문인을 추가 시켰다고 하여, 현풍현도동서원이 주축이 되어 문인록에 대한 변파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밀양향교 측은 본 통문을 도동서원에 발급하여, 정황은 없었지만 문집 중간은 공의에 의한 것이며, 추가된 문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김식의 문집 중간 과정을 변론해 놓았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74년 7월 초1일 慶尙道 密陽都護府密陽鄕校 측이 『佔畢齋先生文集』 중간 과정에서 발생한 門人錄 문제와 관련하여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에 발급한 通文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74년(고종 11) 7월 초1일 慶尙道 密陽都護府密陽鄕校 유림 朴祥穆·孫學敎·安仁遠·李敏行·閔泳純·曺應奎 등이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密陽鄕校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은 『?畢齋先生文集』 중간 과정에서 추가된 門人錄이 논란을 일으키자, 밀양향교 측이 변론하기 위하여 발급한 것이다.
본 통문의 원인이 되는 『점필재선생문집』 중간본은 1869년(고종 6) 밀양도호부禮林書院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중간을 주도했던 인물은 金宗直[1431~1492]의 13대손 金埴[1807~1876]이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새롭게 추가된 문인록이었다. 이전에 간행된 문집과 비교해 문인 10명을 추가하며 모두 59명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金宏弼[1454~1504]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문인록 추가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중간 과정에서 공론을 구하지 않았으며, 김식이 금품을 수수하고 부당한 인물을 문인으로 추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굉필의 후손들과 그를 배향한 도동서원 측은 列邑에 통문을 보내어 문인록에 대한 辨破를 주장하였다. 밀양향교 측도 이 문제와 관련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밀양향교래문」을 변파 주장의 중심지였던 도동서원에 발급하였던 것이다.
「밀양향교래문」에서 밀양향교 측은 김식의 『점필재선생문집』 중간 문제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난처한 입장임을 군데군데 피력하며, 김식 문집 중간을 변론하고 있다. 특히 공론을 거치지 않고 문집을 중간했다는 것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변론하고 있는데, 문집 중간이 밀양도호부예림서원에서 진행된 관계로 밀양향교에서도 어떠한 입장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밀양향교 측은 당시 경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866년(고종 3) 겨울 김종직의 본손인 김식 노인이 중간하는 일을 고을에 두루 물었지만, 이때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유림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이 일을 차분히 살펴 볼 수 있는 경황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나, 김식의 老心에 심히 미안해서 흔쾌히 중간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갑자기 여러 각수들을 데리고 온 뒤 간행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發文하여 이 일은 우리 가문에서 오래 전부터 추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는 案件으로서 이제 가문에서 중간을 확정지었고, 또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校勘을 했으며, 재물을 모아 간행 경비를 마련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고을의 章甫들이 잘못된 字?을 고쳤다며 중간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문집의 중간 경위와 함께 덧붙여 문인록의 添錄은 우리 고을에서 이루어 진 수백 년 간의 公議이지, 김식 노인의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밀양향교 측은 중간 과정에서 분명 공의를 거쳤음을 변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와서 첨록된 문인록을 削正하자는 주장은 의리에 맞지 않으며,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자신들이 訝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 김식의 손자가 도동서원高靈縣에 보낸 통문을 가져와, 이를 보고 자신들이 이 일을 진행하게 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당시 고령현에는 김종직의 ?孫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앞서 이 문제와 관련해 도동서원 측이 김종직의 주손에게 문인록 변파를 건의하는 통문을 발급하였다. 이어 통문 말미에는 削正의 일은 본손의 일이지 다른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있는 일이 아니라며, 잘 살펴 주기를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문인집단의 師承關係과 조상추숭의식의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가 누구의 학문을 계승하였는가는 해당 인물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입장에서도 학문적 위상을 담보 받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후기가 되면 학자들끼리의 사승관계와 관련된 각종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 유형은 다양한데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사승 관계 여부, 嫡傳을 둘러 싼 경쟁, 그리고 본 통문에서 나타나는 문인록의 범위와 관련된 분쟁이 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학문적 위치를 확립하여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사회·경제적 변화로 향촌에서 재지사족의 지위가 약화되어가는 조선후기에 더욱 치열하게 일어났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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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鄕校來文【甲戌七月初一日朴祥穆孫學敎安仁遠李敏行閔泳純曺應奎等】
右文爲回諭事伏以畢齋先生文集重刊在八九年
所當時??之役拖至二十之久淵源各家似當有
聞知之道而寂無一言鳧鶴矣今此斷筆閱歲之後
屢次飛通責之以不敢當之義理擔之以不相干之
是非請略爲蕉展可乎當初丙寅畢翁本孫金埴

老人以重刊事詢于一鄕時値各院毁撤之日儒林喪
氣不遑他事稍待風靜浪息之後務歸十分停當之意
懇辭止之則此老心甚未安而姑爲唯諾矣翌年春多
率刻手突兀而來發文設會于本院曰今此重刊之役
自吾族祖參議公經紀則乃是吾父兄未了之案而門論
已定又經江皐丈席校勘之筆則道論已成鳩財之方
亦有措劃本鄕章甫第觀字劃之訛漏毋用贅辭於存
拔之地云云故其時鄙等雖是先生世鄕之後生而其
在本孫尊祖之地有不敢終始沮戱故任其施措而時
或往參者以所重之在彼故也若其門徒添錄事是鄙

鄕屢百年共公之議而金氏門通之所許錄者也不
獨此老之私自擅便者也當初許錄抑何所見到今
削正亦何義理也此實鄙等之所訝惑者乎是何?
隙出於這間金埴甫使其孫持道東通文抵高靈
私草來云鄙邑而辭意悖妄語逼先輩故鄙等徒聽
一邊之言遽爲發通不善之誅烏可?哉然其削正
之敎是先生本孫之事非他人所敢爲之說也伏願
僉君子恕察之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