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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경 「고령김식문(高靈金埴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74.2771-20180630.Y185030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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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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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식, 도동서원,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874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경 「고령김식문(高靈金埴文)」
1874년(고종 11)경 경상도(慶尙道) 고령현(高靈縣)김식(金埴)[1807~1876]이 경상도 현풍현(玄風縣)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측이 수급한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고령김식문(高靈金埴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서 김식은 『점필재집(?畢齋集)』 중간 과정에서 제대로 협조하지 않은 다른 족원(族員)들을 규탄해 놓았다.
통문을 발급한 김식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13대손으로 1869년(고종 6)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을 중간하였다. 김식은 중간을 시작하면서, 일족들에게 물력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적극적인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재답(先齋畓)과 김종직이 손수 심은 나무를 방매하여 중간에 필요한 물력으로 삼았다. 이에 몇몇 족원들이 함부로 일을 처리했다며, 가산(家産)을 탈취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김식은 통문을 발급하여 자신들의 입장에서 중간본 간행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언급한 후, 제대로 도와주지 않은 다른 족원들의 잘못을 규탄하며, 도동서원 측에 올바른 판단을 요청하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74년경 慶尙道 高靈賢金埴이 『佔畢齋集』 중간본 간행 과정에서 제대로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일으킨 大山佳谷의 族人들을 규탄하고자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74년(고종 11)경 慶尙道 高靈縣金埴[1807~1876]이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高靈金埴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고령김식문」에서 김식金宗直[1431~1492]의 문집인 『?畢齋集』 중간본 간행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일으킨 居昌都護府 大山고령현 佳谷의 族人들을 규탄해 놓았다.
통문의 발급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1874년경으로 추정된다. 『각처통문등초』 제1의 「고령김식문」 바로 앞에는 1874년 3월 발급된 「高靈佳谷來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통문은 고령현 가곡김종직 ?孫 측이 김식을 규탄하고자 도동서원에 발급한 것인데, 본문에서 주손 측은 「고령가곡래문」이 앞서 보낸 김식의 통문 때문에 발급한 것이라고 밝혀 놓았다. 주손 측은 이 갈등과 관련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근래 김식도동서원에 통문을 보내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였는데, 그 辭意를 보니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통문을 보냈다고 한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고령가곡래문」의 단초가 된 김식의 통문이 바로 본 「고령김식문」으로 추정되며, 이것의 작성 연도를 1874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점필재집』 간행과 관련된 갈등은 본 통문에서 김식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종직 후손 간의 갈등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점필재집』 중간본은 1869년(고종 6) 김종직의 13대손인 김식密陽都護府禮林書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중간본은 舊本과 비교해 체제에서 많은 차이가 났으며, 무엇보다 門人錄을 增補하였기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구본에 없던 김종직 문인 10명을 추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김종직의 대표적인 문인인 金宏弼[1454~1504]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김굉필을 祭享한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김식의 문인록 증보를 규탄하였다. 김식이 문인록을 증보하는데 사림의 公論을 얻지 않았으며, 심지어 김종직의 주손 의견도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거기다 문인록 증보 과정에서 사사로이 금품을 수수하고 합당하지 않은 인물을 추가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였다. 여기에 주손 측도 도동서원의 측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김종직 후손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김식은 문집 중간에 비협조적이었던 주손 측과 다른 족인들을 규탄하고자 본 통문을 발급하게 되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본 통문에서 문제가 된 문인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식 입장에서는 주손과 다른 족인의 협조를 받지 않고 문집을 중간했다는 것 자체가 문인록 증보를 비판하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기에, 논점을 주손 측의 의도적인 비협조로 돌려 문인록 문제를 불식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고령김식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 김식은 먼저 글을 登梓하는 까닭은 도학이 전승되고 퍼지는 것을 잃어버릴까 걱정하기 때문이라며, 문집 중간의 당위성을 언급해 놓았다. 이에 선조 文忠公 김종직은 우리나라 도학의 宗主였지만, 불행하게도 戊午士禍를 만나 후학을 일깨워 줄 文籍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하늘이 斯文의 運을 없애지 아니하여, 무오사화 22년 뒤에 康伯珍[?~1504康仲珍[1459~1520] 형제가 남은 문적을 修葺해 놓은 것으로 겨우 8권을 간행했다고 하였다. 이것이 1520년(중종 15) 간행된 『점필재집』 초간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초간본 목판은 70여 판만 남게 되었으며, 세월이 오래되어 판목이 썩고 부패하여, 장차 선생을 숭상할 만한 문적들이 거의 煙沒하기에 이르게 되어, 실로 사문에서 안타까워하고 本孫이 억울해 하는 바라고 하였다. 거기다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사문이 더욱 어수선해졌으니, 이때야 말고 문집을 중간해 올바르게 전하지 않는다면 더욱 痛迫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중간의 당위성을 언급해 놓았다.
이에 지난 1869년 봄 문집 중간의 일로써 諸宗에게 通諭했으나, 큰일을 하기에 힘이 부족하여 刊刻은 뒷날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있었고, 단지 한 두 族員이 같은 마음으로 상응한 까닭에 역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우선적으로 정성을 다해 도를 지켜나가야 된다는 마음으로 예림서원에서 중간의 거사를 여러 사람에게 통유했다고 한다. 이때 다행히 여러 군자가 慕賢의 정성에 기꺼워했으며, 중간에 동조해 주었기에 淵源의 世誼가 있는 가문에 통고하고, 대산가곡의 兩宗에는 200냥을 排錢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거창도호부대산은 무오사화 직후 김종직의 후손들이 은거한 곳이며, 고령현가곡은 주손이 살고 있던 곳이다. 문집 간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대산가곡의 일족에게 각각 100냥씩을 배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족인의 협조는 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간 작업이 시작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奉審을 하러 오는 族員이 없을뿐더러, 배전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이 해 7월 그믐, 문의 종손 金昌鉉[1847~1921]과 正言 金養默이 겨우 10냥의 돈을 내어 刊所에 보내왔고, 이때 任司를 간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의 門物은 모두 써 버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우리 가문의 延豊宅에서 20냥, 대산에서 20냥만 보내 왔을 뿐, 이후로는 대산가곡 모두 한 푼의 돈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간소의 군색함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까닭에 任司와 僉員은 문집 중간이 사문의 盛事이나 물건이 없어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며, 원래 이런 일은 본손의 노력이 있고 뒤에 사림이 따라 응하는 것인데, 형세가 그렇지 않음을 탄식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식 측은 다른 족인의 비협조로 문집 중간이 원만하지 못했음을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물력 마련책으로 부득이 族人이 납부한 先齋畓 2두락지를 36냥에 방매하여 대산·가곡의 배전에다 補用하였고, 부족한 돈 114냥은 빌려 썼다고 하였다. 이렇게 물력을 마련해 중간을 마치고 落成宴을 하게 되었는데, 마땅히 본손은 모두 참여해야 하나, 이들은 단지 어린 소년만을 보내어, 이리저리 둘러보고만 가니 매우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물력이 적은 관계로 다만 30질의 중간본만 인쇄하여 頒布하였고, 이어 지난겨울 誤字를 校正한 후 추가로 인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도 물력이 부족하여 先齋 아래의 연못 둑에 있는 나무 21주를 42냥에 방매하여 보충하였다. 여기서 先齋는 김종직의 묘소를 관리하는 재실의 齋位畓으로 보인다. 분명 이 재위답은 문중에서 공통으로 마련했을 것인데, 주손과 다른 족인들이 문집 중간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여, 김식이 임의로 방매하였던 것이고, 결국 후손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었다. 통문에 따르면 저 족인들은 배전을 내지 않았으면서도, 선생, 즉 김종직이 직접 심은 나무을 잘라 판 것을 트집 잡아, 여러 족속을 이끌고 밤에 와서 家産을 탈거해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당초 간소를 설치할 때 門論이 통일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김식 등이 주축을 이루어 힘을 다해 자신들만으로 일을 성사시키자, 이를 시기해서 그런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설사 선생이 직접 심은 나무라 할지라도, 다른 것도 아니고 문집을 간행하는 썼으니, 이는 사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官舍의 題音을 인용해 놓았다. 가산 탈취 후 訟事가 일어났는데, 이에 관사는 관련 ?頭 6인을 잡아 가두었으며, "당초 일의 상황은 놓아두고,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의 상태와 모양은 너의 宗中이 크게 체모를 잃어버린 것이다. 빼앗아 간 물건은 마땅히 찾아서 내어주고, 즉시 물러 갈 것이다."라는 뜻의 뎨김을 내렸었다. 가산을 돌려주라고 한 것 자체가 명분상으로도, 법적으로도 김식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통문 말미에는 갈등의 경위가 이상과 같은데, 저 대산가곡의 족인들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虛無한 말로 글을 지어 내어 열읍에 통고하고 있으니, 도동서원 측이 살펴본 뒤 玉石을 가려 달라고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광범위하게 전개된 鄕戰의 한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재지사족 간의 향권 쟁탈전인 향전은 그 경향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複雜多技한 것이 바로 가문 간의 갈등이었다. 조선후기 이후 부계 중심의 가문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각 가문은 해당 顯祖에 대한 각종 조상추숭사업을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현조의 권위를 재활용함으로써, 해당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조상추숭사업을 경쟁적으로 진행하다 보니, 다른 가문과 우열경쟁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이 향전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나타났다. 특히 師承關係, 현조의 位次 문제, 文字是非 등이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그런 조상추숭사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도 향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점필재집』 중간 문제는 김종직 후손 간의 주도권 갈등, 그리고 사승관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다른 가문과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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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靈金埴
伏以文之所以登梓者憂道學之失其傳而刊也噫
惟我文忠公?畢齋先祖以東方道學之宗主不幸

戊午之禍詔後文籍盡入於?燼之中而稍有天未
喪斯文之運戊午後二十二年康無名齋兄弟氏修
葺餘籍僅刊八卷矣兵?之後先板者七十餘板存
餘則歲久板朽將使先生風韻之載籍可尙者幾至
煙沒則實爲斯文上慨惜而其於本孫之抑鬱當何
如哉且有?院之朝今截嚴以愚淺見思之則?享
而無刊傳則尤爲痛迫故去己巳春以貴集重刊事
通諭諸宗則事巨力綿難以刊刻姑俟日後云云而
但一二族員同心相應故不料■〔闔〕門之炎凉一以效
爲先致死之誠一以爲扶源衛道之心往于禮林

院以重刊之擧通諭僉尊則幸賴僉君子慕賢之誠
完誠〔說〕重刊之役而以補助之意通告于淵源世誼家
大山佳谷兩宗則以本孫之例自會中排錢各二
百兩設役多月以〔無〕員奉審又無送排錢矣是年七月
晦鄙家宗孫昌鉉正言養默氏僅辦十兩錢來于
刊所艱請任司曰鄙門門物掃盡云云而但以各一
百兩記錄於排錢冊以其後只送鄙族延豊宅錢二
十兩大山排錢只送二十兩而兩門中更無一分錢
收送之道而刊所之窘去益甚急故任司僉員咸曰
貴先生文集重刊事寔出於經營未遑之餘則斯文

之盛事而其於無物不成之歎何哉事須先生之事
而必須本孫努力後士林之隨應豈非理勢之固然
乎設刊累月所用者莫非財力而各處排物尙不來
到豈非觀望本孫之如何哉不得已嚴光鄙族人所
納先齋畓二斗地以三十六兩放賣而補用大山
兩條零排合百十四兩生以債用告功訖以定落
成宴本孫當皆參而不此之爲只送一少年來族又
歸瞻視甚愧然拘於物少只印三十帙頒布而去冬
更各計以誤字更爲校正所費又不少故以先齋下
澤堤木二十一柱以四十二兩放賣用之噫彼族人

不出排錢而執?先生手植木斫賣率諸族夜來奪
去家産如是者無他故也當初設刊不待門論之歸
一也至於竭力敦事則有猜忌心也設使先生手植
用於先生刊事於理不悖故告于官舍則囚其?頭
六人題音內當初事狀姑舍日前光景汝矣宗中大
失體貌奪去物件當推給而卽爲退去向事於是族〔大〕
佳谷族人有愧於心而暗生凶計幻出虛無之言
文告于列邑頭天足地寧有此無理之理乎玆敢略
陳望須詳察以辨玉石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