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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20년 1월 초5일 「도산서원래문(陶山書院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20.2771-20180630.Y1850302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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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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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20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6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20년 1월 초5일 「도산서원래문(陶山書院來文)」
1920년 1월 초5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도산서원(陶山書院) 유림이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도산서원래문(陶山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서 도산서원 측은 안동군 대곡리(大谷里)에 거주하는 이유호(李有鎬)의 처(妻) 전주최부인(全州崔夫人)의 열행(烈行)을 길게 소개한 후, 그녀의 미담이 널리 알려지기를 건의해 놓았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20년 1월 초5일 慶尙北道 安東郡陶山書院 유림이 全州崔夫人의 烈行을 襃獎하는 것과 관련해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20년 1월 초5일 慶尙北道 安東郡陶山書院 유림 有司 幼學 李中赫, 前 參奉 李中軾, 進士 李康鎬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陶山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은 全州崔夫人의 烈行을 ??함으로써, 그녀의 이야기가 泯滅되지 않고 두루 알려지면 좋겠다는 취지로 발급되었다. 포장의 주인공인 전주최부인안동군 대곡리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參判을 지낸 崔琳의 후손 崔基榮의 딸이며, 退溪 李滉[1501~1570]의 12대손 李中時의 아들 李有鎬의 아내이다. 통문에는 열행의 의미를 언급한 후, 전주최부인의 열행을 길게 설명해 놓았는데, 그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주최부인은 어릴 때부터 덕성이 있었는데, 이유호에게 시집 간 이후부터는 婦道를 지켜 나갔다. 시부모를 봉양함에 항상 맛난 음식을 대접하였고, 겨울에는 밤이 깊어도 거듭 잠자리가 차가운지 따듯한지 안부를 여쭈었으며, 시중을 들 때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의 부름으로 길을 나선 남편 이유호가 객지에서 병이 났고, 이유호는 藥房의 말에 따라 靑松 周房山에 들어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이 소식을 들은 최씨는 집 뒤뜰에 壇을 쌓아 매일 밤 우물물을 떠놓고 남편의 쾌도를 기도하였고, 책을 보고 병에 좋은 것을 찾아다닌 것이 여러 해였다. 남편의 병환으로 최씨는 매일 마음이 타 들어가 껍질만 남은 형편이었지만, 시부모 앞에서는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남편이 집에 한 번 다녀가길 청하였다. 이에 生舅 李中直이 병자의 손을 잡고 12월 9일 추운 눈길을 무릅쓰고 한 밤 중에 집으로 찾아왔는데, 남편의 숨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부모 형제들이 남편의 손을 잡고 둘러앉았지만, 최씨는 홀로 조용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용색을 숨겼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최씨의 本家 先祖의 忌日이었다. 그리고 최씨는 혼자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개울에서 목욕 한 후, 집안의 으슥한 곳에서 칼을 꺼내 들어 오른쪽 허벅지 살을 베고, 다시 왼쪽 허벅지를 베려는 찰나, 시누이가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방안에 피가 낭자한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허벅지 살을 남편에게 봉양하려 했던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시부모가 놀라 달려오자, 최씨는 담담히 허벅지를 싸매고 시부모를 달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남편의 차도를 위해 작은 시험을 해 볼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이후 남편이 이불 자리에서 많은 땀을 흘린 후, 눈을 떠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粥飯을 먹였다. 약간의 기운을 차린 남편이 아내를 보며 칼로 살을 잘랐느냐고 묻자, 최씨는 처음에는 생선으로 그렇게 한 후, 허벅지를 베려고 한 것인데, 시누이가 발견하여 그치게 되었다고 하면서,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지 殺身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통문에서는 최씨의 열행을 길게 소개 한 후, 부녀자로서 유연히 처신하였으니 烈丈夫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殺身한 것은 아니지만 높이 살만한 행동이라고 칭송해 놓았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모두가 같은 뜻으로 두루 알렸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이후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생활 규범으로 정착함에 따라, 부녀자의 윤리 규범도 이 질서에 맞추어져 갔다. 특히 남편에 대한 절개와 시부모에 대한 열행이 미담으로 칭송 받게 되었으며, 국가에서는 이러한 부녀자들을 포장하였다. 이에 조선후기 법전인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합치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의 연초 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펴, 議政府로 이송한 뒤에 別單으로 왕에게 보고토록 규정되어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녀자의 열행을 포장하였으며, 사회·경제적 혜택도 내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 문물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윤리 의식도 약화되어 갔고, 부녀자의 열행에 대한 제도적인 예우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던 향촌사회의 보수 유림들은 본 통문에서처럼 개별적으로 부녀자의 열행을 드러내어 포장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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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山書院來文【庚申正月初五日有司幼學李中赫參奉李中軾進士李康鎬
右文爲通諭事伏以生等聞之古語曰倉卒判命易

從容就義難夫爲夫之死也而殉身以從亦已烈矣
至若求夫之生而割肉以求病尤不亦卓卓乎其難
哉惟其擧措之有難易故其感人也亦不能無淺深
生等於近日本鄕大谷里全州崔夫人見其擧措之
爲尤難而感人之深也崔氏卽崇禎年間參判
之后士人基榮之女而退陶文純公十二代孫李中
之子有鎬妻也夙有德性及歸有鎬事舅姑甚得
婦道凡係奉養一味之甘必蓄而待之冬夜深更必
候其寐席之冷而起熱之遇事輒涕泣微諫期在平
順隣里稱道之有鎬不幸有病〔疾〕久未廖爲其便於醫

藥去入靑松之周房山以責效爲還期自是崔氏
壇于後園每夜汲井華祝天每月必書探其動靜者
數年于?矣積憂焦傷僅存形殼而舅姑之前不敢
有一毫夏愁之色間或有小差之報而然疑尙多苦
請病者一來又欲一躬往而不得乃於臘月九日其
本生舅中直矜悶其情勢携病者乘夜到達雪程觸
冒凜綴之狀自可想得矣父母弟妹執手掩抑獨
拱立于傍俯仰其容色而已其日卽本家先忌也
崔氏親自供需獻饋?畢待家人就睡出溪邊沐浴
汲水祈禱如前日遂屛處堂隅取食刀割右股初切

一?次切一?又次切一?將欲復割左股而小姑
忽驚悟開門?視燈影之下血流滿堂蒼皇呼毋舅
與姑卽起大聲椎胸崔氏却掩衣其傷處慰?之曰
以渠妄作舅姑氏驚動至此罪無可言但斷者不可
復續行望?請病者少試之至願舅見其言辭氣貌
安閑中更覺凜烈遂招出病者于前崔氏復切而盛
椀以進病者不忍輒口崔氏謂曰百般調方似無現
效是君子所深恨況此死生榮辱隨人爲命者乎此
若不如願用以伏?於前非難事也病者?然垂淚
從之崔氏引入煖?覆厚衾見其汗出然後退抱幼

子左膝而乳之須臾昏倒舅姑呼之良久則開目曰
有食物不擇粥飯以來吾非死人如有欲死之心俄
者刀割也初欲取魚腹爲其筋脈所係而止取之於
股吾意只要其療病不在於殺身此其顚末也於乎
孰謂是柔軟一婦女乃能辦得此千古烈丈夫之所
難爲也哉蓋其回天之誠積歲累年無所不至末乃
以此身爲醫病之資利刀之剝一之不足而再之再
之不足而又三之忍痛茹毒不自知止■〔迹〕其所以爲
心者凜乎其危矣卓乎其烈矣至若慰勉舅姑婉辭
以對之護調病者期至出汗則其委曲雍容殆無異

履平地而處常事又其不以殺身爲高而慮及於?
脈之係則見識之高遠有如是矣此之爲難又豈一
時溝瀆之諒之可擬哉似此偉行不可泯沒玆庸奉
聞於一者同志伏願僉尊諒察而回敎之善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