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고종 12) 1월 慶尙道 密陽都護府의 密陽鄕校 유림이 『佔畢齋集』 중간본 수록 門人錄 문제와 관련하여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75년(고종 12) 1월 慶尙道 密陽都護府의 密陽鄕校 유림 孫?瑜·朴尙朱·李鍾震·安孝知·閔致洪·安仁遠·曺煥奎·孫性秀·李亨澤·閔泳純·孫岐秀·安參龜·朴漢永·申永瑀 등이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密陽鄕校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은 『?畢齋集』 중간본에 수록된 門人錄 때문에 발급된 것이다. 金宗直[1431~1492]의 문집인 『점필재집』 중간본은 1869년(고종 6) 그의 후손 金埴[1807~1876]이라는 자가 밀양도호부의 禮林書院에서 편찬하였다. 그런데 이 중간본의 문인록에는 舊本과 비교해 10명의 김종직 문인이 增補되어 있었다. 이에 金宏弼[1454~1504]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문인록 증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중간 과정에서 공론을 구하지 않았으며, 김식이 금품을 수수하고 부당한 인물을 문인으로 추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굉필의 후손들과 그를 배향한 도동서원 측은 列邑에 통문을 보내어 문인록에 대한 辨破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동서원 측의 변파 주장에 대하여, 밀양향교 측은 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문인록 변파를 주장하는 도동서원의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여론전을 펼쳐 나갔다. 즉, 김식이 편찬한 중간본의 문인록을 옹호하였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밀양향교 측이 본 통문을 도동서원에 발급하였던 것이다. 본 통문에는 도동서원 측이 일전에 보낸 통문에 朴漢柱[1459~1504]를 모욕하는 문구가 있다며, 강한 유감의 뜻을 표시해 놓았다. 명실상부 김종직의 대표적인 문인인 박한주를 모욕하는 문구가 있음을 지적하여, 문인록 변파의 입장을 고수하는 도동서원의 강경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밀양향교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통문에서는 『점필재집』의 續附錄 補板을 그대로 둔 것은 衛道하겠다는 여러 군자의 뜻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도동서원 측은 밀양도호부 지역에 여러 번 통문을 보내어 문인록 변파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밀양향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문인록을 그대로 두겠다는 의사를 본 통문 가장 서두에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보낸 통문을 보니 소름이 끼치는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 당초 문집을 중간 할 때, 佳谷의 김씨가 看儉하기 위하여 왕래한 것이 여러 차례이지만, 道會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 김식의 죄이며, 가곡의 김씨들도 마땅히 그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가곡의 김씨는 高靈縣 가곡에 거주하는 김종직의 종손을 뜻한다. 처음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도동서원 측은 김식이 다른 유림과 종손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문집을 중간했다고 비난하였었다. 이에 대해 김식은 가곡에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며, 유림의 의견을 묻기 위해 道會를 열었으나 참석자가 적었다며 변론하였다. 하지만 재차 도동서원 측은 김식이 가곡의 종손에게 알릴 때, 문집 중간만 이야기 했지, 문인록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도회는 주위에 들은 유림이 없어 과연 열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와 관련해 본 통문에서 밀양향교 측은 가곡과의 왕래는 김식의 말이 맞으나, 도회 개최가 석연찮은 것은 김식의 잘못임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을 선배의 添入은 고찰할 수 있는 문자로써 가곡의 김씨 문중에 통고해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문인록 편찬이 분명 가곡 종손의 동의하에 이루어졌음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이어 통문 중반부터는 도동서원 측에 강한 유감을 표시해 놓았다. 먼저 자신들은 옛 일에 淺薄하여 스스로 쑥대라 생각하며, 頑鈍한 존재라고 낮추고 있다. 그래서 도동서원의 통문이 왔을 때 지난봄과 가을 동안은 침묵을 지켰지만, 말이 점점 거칠어져 이번 통문에 "百世之下에 무엇인가 冒僞尊祖가 있어서, 누구냐고도 묻지 않고 이를 書錄하였다"라고 云云한 것이 있으니, 이는 抑說이고 悖說이며, 문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였다. 마음대로 문인록을 增補했다는 도동서원 측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이어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라고 하였다. 통문에 ‘朴哥’를 지칭한 문구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鬼神을 가리키는 것이냐며, 도리어 의문을 표시한 뒤, 이는 박한주 선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해 놓았다. 그러면서 박한주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인물로 『점필재집』 舊刊 중에도 김굉필·鄭汝昌[1450~1504]과 함께 甲子士禍로 被禍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예림서원에 제향된 자이며, 國史에도 드러나 있어, 우리 사림이 함께 존봉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분들이 거짓으로 ‘박가’라는 이상한 한 놈을 만들어 선현을 逼辱했음을 비난하였다. 실제 중간본의 문인록에는 증보된 문인으로 다른 박씨가 있었지만, 밀양향교 유림들은 이를 박한주라 단정하고 도동서원 측에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통문 말미에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잘 못 본 것이 있어서 지적한 것이라면, 通末과 通首를 表章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렇지 않고 통문을 쓰는 사람이 붓 가는 대로 마음대로 쓰고, 명예와 지위가 있는 자들은 이를 잠깐 훑어 본 채, 이를 ‘박가’로 판단하였다면 더 이상 이런 횡설수설에 우리는 어떠한 분변도 할 수 없다는 유감의 뜻을 표시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師承關係를 둘러싸고 재지사족 간에 전개된 鄕戰의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이후 가문의식의 확장에 따라, 조상추숭사업이 경쟁적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顯祖의 권위를 재활용함으로써, 사회·경제적 변화로 향촌사회에서 약화되어 가던 재지사족의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가문과 우열경쟁이 일어나거나, 사승관계 및 文字에 의한 각종 시비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본 통문의 시비도 문인의 실제 사승관계 여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