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 4월 20일 「성주모연재래문(星州慕淵齋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74.2771-20180630.Y1850302036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모연재,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874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74년 4월 20일 「성주모연재래문(星州慕淵齋來文)」
1874년(고종 11) 4월 20일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모연재(慕淵齋)에서 경상도 현풍현(玄風縣)도동서원(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측이 수급한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성주모연재래문(星州慕淵齋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성주모연재래문」에는 성주·현풍 지역 출신으로 도동서원 배향 인물인 정구(鄭逑)[1543~1620]의 문묘(文廟) 배향 청원과 관련해, 오는 7월 20일 도동서원에서의 도회(道會) 개최를 통고해 놓았다. 우리나라에 문묘가 설치된 이래, 문묘 배향은 유신(儒臣)의 최고 영광이었기 때문에, 가문 의식이 심회되는 조선후기 이후 후손 및 학통을 계승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정구와 같은 유학자에 대한 문묘 배향 청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정구의 경우 19세기 후반 이후에 후손 및 지역 유림이 주축이 되어 청원 상소를 빈번하게 제출하였는데, 본 통문도 그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74년 4월 20일 慶尙道 星州牧慕淵齋에서 鄭逑의 文廟 배향 청원 관련 道會 개최를 알리기 위해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에 발급한 通文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74년(고종 11) 4월 20일 慶尙道 星州牧慕淵齋 유림 崔永恒·金昊哲·金昊?·張祖憲·李承熙 등이 경상도 玄風縣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星州慕淵齋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는 鄭逑[1543~1620]의 文廟 配享 청원과 관련하여, 道會가 개최됨을 통고해 놓았다.
「성주모연재래문」에서는 먼저 정구에 대한 請?疏, 즉 문묘 배향 청원 상소는 우리 영남의 大義라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올린 상소에 대하여, 국왕의 兪音은 오히려 더디기만 하니, 우리가 매우 억울해 하는 바라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난겨울 갑자기 문묘 배향 청원에 관한 의론이 일어나 급히 上京하였으나, 忙迫한 나머지 도내에 널리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있다. 결국 도내 유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진행한 관계로 지난 번 청무 상소는 그만두고 再擧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며, 오는 7월 20일 도동서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도회를 개최하니, 많은 참석을 바라는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이후 전개되었던 재지사족 주도의 문묘 종사 운동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우리나라에 문묘가 설치된 후, 문묘 배향은 儒臣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배향자의 후손, 그리고 학통을 계승한 이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학문적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가문 의식이 심화되는 조선후기 이후, 종전과는 달리 중앙 정부가 아니라, 재지사족 주도의 문묘 종사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정구는 退溪學派와 南冥學派를 함께 계승한 유학자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기에 조선후기 이후 그의 학통을 계승한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꾸준히 문묘 배향 청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19세기 후반 집중적으로 문묘 배향 청원이 이루어 진 것으로 확인된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星州慕淵齋來文【甲戌四月二十日崔永恒金昊哲金昊?張祖憲李承熙等】
右文爲奉告事伏以先師文穆公請?疏事係是吾
大義也屢蒙恩批兪音尙遲實爲吾黨之所共抑
鬱往在冬間猝發論議急時上京而緣於忙迫未及

廣通于道內竊想僉尊賜?多矣數朔盤桓竟至撤
歸雖其事機之不得不然而待秋再擧亦是不已之
義也以七月二十日定道會于貴院伏愿僉君子濟
濟來臨合席爛商?完大事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