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慶尙北道 禮安郡 陶山書院 유림이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景節公實紀』의 板木 毁破을 건의하고자 慶尙北道 慶州郡의 玉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5년(광무 9) 慶尙北道 禮安郡 陶山書院 유림이 慶尙北道 慶州郡의 玉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道東書院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陶山通玉山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통문은 孫李是非와 관련해 『景節公實紀』를 간행한 慶州孫氏 측을 규탄하고, 실기의 板木 毁破를 건의하고자 도산서원에서 옥산서원에 발급한 것인데, 『각처통문등초』 제1의 다른 통문과 달리 세주로 수록되어 있다. 이 통문 바로 앞에는 같은 사유로 옥산서원 측이 도동서원에 보낸 「玉山書院來文」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말미에는 도산서원에서 수급한 통문을 베껴 첨부한다고 기재해 놓았다. 즉, 「도산통옥산문」은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1905년 10월 옥산서원 측이 도동서원을 비롯하여 도내에 발급한 「옥산서원래문」에 첨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도산통옥산문」의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문 서두에서 도산서원 측은 "‘淵源道脈’은 斯文上 하나의 큰 公案"임을 전제하였다. 그렇기에 사사로이 스승과 제자 관계를 설정할 수 없는데, 지금 경주손씨들이 다시 분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이냐며 성토해 놓았다. 이는 孫仲暾[1463~1529]과 李彦迪[1491~1553] 간의 학문 연원 관계 때문에 손이시비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경주 良洞에는 경주손씨와 驪州李氏가 세거하고 있으며, 각각 손중돈과 이언적을 현조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손중돈은 이언적의 외삼촌으로 이언적은 어린 시절 외삼촌에게 글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훗날 경주손씨 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언적의 성리학이 손중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祭享한 東江書院 廟宇 중건 때 李象靖[1711~1781]이 쓴 上樑文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상량문은 여주이씨 측의 항의로 바로 고쳐졌고 원본이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 경주손씨 측이 손중돈의 실기의 편찬하면서 이상정이 썼다고 하는 ‘연원도맥’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이언적의 학문은 손중돈에게 연원하며, 그의 도맥을 계승했다는 뜻인데, 이에 대해 도산서원 측은 통문 서두에서 경주손씨가 사사로이 스승과 제자 관계를 설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어 통문에서는 저들이 1905년 사이 家狀을 찾아내어 본디부터 없는 휘를 넣어 보충하였고, ‘연원’이라는 글자에다 ‘도맥’이라는 글자까지 붙여서 杜撰하고 간행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경주손씨가 간행한 것은 손중돈의 실기인 『景節公實紀』로 이 책이 나오자, 손이시비는 더욱 격화되었다. 앞서 1904년 경주손씨 측은 여주이씨 종택인 無?堂에서 이언적이 손중돈을 위해 쓴 行狀과 輓詞를 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정리하여 『경절공실기』를 편찬한 것이다. 그런데 여주이씨 측과 도산서원 측은 행장과 만사의 찬자가 이언적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함부로 이언적이라 단정하고 그 諱를 直書했다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경절공실기』에 ‘연원도맥’이라는 문구를 삽입한 이상정의 상량문을 수록해 놓은 것도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당초 1845년(헌종 11) 경주손씨 측이 손중돈의 실기인 『愚齋實紀』를 간행하려고 할 때, 이상정이 쓴 상량문의 ‘연원’이라는 글자를 넣으려고 하다가 사림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경절공실기』를 간행하면서, 글자를 보태어 ‘연원도맥’이란 문구를 삽입하였으니, 이 역시 경주손씨들이 함부로 쓴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통문 다음 부분에서는 이러한 경주손씨의 주장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다며, 正祖가 이언적을 위해 친히 찬한 祭文을 인용해 놓았다. 거두절미하고 정조가 친히 작성한 이언적의 祭文에 "스승에게 배우지 아니했다"라고 평가한 것을 인용해 놓음으로써, 이언적이 손중돈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경주손씨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이는 앞서 退溪 李滉[1501~1570]이 찬한 이언적의 행장에 나온 문구였다.
통문 말미에는 이 문제에 대한 우려와 대처 방안을 제시해 놓았다. 도산서원 측은 경주손씨 측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보다도, 『경절공실기』가 이미 간행된 것을 우려하였다. 이 책의 배포로 후생들이 그릇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이언적을 제향한 옥산서원 측에다가, 이 실기의 판목을 毁破하여 감히 배포하지 못하게 하자는 뜻으로 도내에 通告할 것을 건의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손이시비는 조선후기 이후 영남 지역에서 전개된 대표적인 鄕戰 가운데 하나이다. 향전은 크게 黨色, 嫡庶, 가문 간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20세기 이후까지도 갈등이 지속된 것은 단연 가문 간의 향전이었다. 가문 간 향전의 대부분은 조상추숭사업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조선후기 부계 중심의 종족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각 가문은 顯祖에 대한 각종 추숭사업을 경쟁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여기에는 현조의 권위를 재활용함으로써, 재지사족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려는 사회적 의도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조상추숭사업이 경쟁적으로 진행하다 보면, 우열의식에 따라 다른 가문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향전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보통 현조의 師承關係, 동문 간 위차 문제, 文字是非 등으로 발생하였다. 손이시비는 그 중에서도 사승관계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향전이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