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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06년 7월 「옥산서원문(玉山書院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06.2771-20180630.Y18503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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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06년 7월 「옥산서원문(玉山書院文)」
1906년(광무 10) 7월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군(慶州郡)옥산서원(玉山書院) 유림이 경상북도 현풍군(玄風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측이 수급한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옥산서원문(玉山書院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옥산서원문」은 손이시비(孫李是非)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주손씨(慶州孫氏)들을 규탄하기 위하여, 옥산서원 측이 도동서원에 발급한 것이다. 손이시비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학문적 연원(淵源)이 그의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에서 비롯되었다고 경주손씨 측이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회재의 후손들은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경주손씨의 주장을 반론해 나갔다. 또한 경주손씨 일문은 안동군(安東郡)도산서원(陶山書院)에 배지(牌旨)를 보내, 회재의 후손들이 함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회재의 ‘후학(後學)’이라 주장했다고 규탄하였다. 이 두 문제에 대하여 도산서원 측은 경주손씨의 주장이 외람되다고 비판하였고, 이어 옥산서원 측도 같은 근거로 경주손씨를 규탄하는 통문을 도동서원 유림에게 발급하여 엄척(嚴斥)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06년 7월 慶尙北道 慶州郡玉山書院 유림이 孫李是非와 관련해 良洞의 慶州孫氏 일문을 규탄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6년(광무 10) 7월 慶尙北道 慶州郡玉山書院 유림 閔泳晩·李紀萬·權宜濬·李能?·南熙朝·任天得·崔鉉弼 등이 경상북도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玉山書院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은 孫李是非와 관련해서 옥산서원 유림이 경주군 良洞의 慶州孫氏 一門을 규탄하기 위하여 발급한 것이다. 晦齋 李彦迪[1491~1553]의 학문 淵源과 退溪 李滉[1501~1570]이 ‘後學’이라고 行狀에 슨 문자를 왜곡했다는 이유다.
통문에서는 먼저 회재의 행장은 퇴계가 쓴 것으로 행장에 기재된 "罔有淵源"과 ‘後學’은 ‘斷案信筆’이라고 규정해 놓았다. 손이시비는 회재의 학문 연원을 愚齋 孫仲暾[1463~1529]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우재회재의 외삼촌으로 어린 시절 글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경주손씨는 이를 근거로 회재의 학문 연원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회재 후손들은 퇴계가 쓴 회재 행장의 "罔有淵源"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그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퇴계 후손이 주축이 된 陶山書院 측도 해당 내용이 들어간 우재 실기를 破板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후 경주손씨 측은 도산서원에 牌旨를 보내 퇴계회재의 ‘後學’이라는 문구를 회재 후손들이 함부로 쓴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 측은 이미 오래 전 『退溪集』을 간행 할 때,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을 알았고, 역시 같은 취지의 내용이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 들어가 있다며, 분란을 일으키려는 경주손씨 측을 규탄한 적이 있었다. 특히 통문에서는 ‘後學’이라는 것을 빌미삼아 경주손씨가 기존의 결정을 ?案하려 패악한 배지를 돌린 것에 대해, 이는 세 가문을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것임을 규탄해 놓았다. 또 도산서원에서 이전에 破板을 이야기 했는데, 우재의 실기가 몰래 유포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여러 사림들이 경주손씨들의 이러한 행위를 嚴斥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이후 부계 중심의 종족 의식의 강화됨에 따라, 해당 종족의 顯祖를 추숭하는 각종 조상추숭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상추숭사업이 경쟁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현조에 대한 각종 우열 시비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현조의 학문적 연원과 位次 문제였는데, 그 중에서도 회재우재의 학문적 연원 관계를 둘러 싼 손이시비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중 간 갈등이었다. 손이시비는 단순히 두 가문의 갈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남 지역의 여론을 양분한 갈등이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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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玉山書院文【丙午七月日閔泳晩李紀萬權宜濬李能?南熙朝任天得崔鉉弼

伏以我晦齋先生行狀卽陶退先生所撰也狀文中
之罔有淵源字狀文下之後學字莫非斷案信筆而
昭載於老先生文集者也孫氏冊子期欲?案於
狀文淵源字杜撰之不足而後學字悖牌之無難
至有作文三家又出於陶山後人斯文之變莫此極
矣所以先自陶山前旣有破板之通今又收送潛布
冊子而此通亦來故謄聯輪告鳴乎公議所在吾闔
省衛道之誠寧有異同於陶山士林之嚴斥不已者
乎伏願僉尊諒悉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