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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13년경 「안동하회단자(安東河回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13.2771-20180630.Y185030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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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하회,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13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13년경 「안동하회단자(安東河回單子)」
1913년경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하회(河回)의 유림이 경상북도 현풍군(玄風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단자이다. 이 단자는 도동서원에서 엮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안동하회단자(安東河回單子)」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단자를 통해 하회의 유림들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편찬 중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을 성토하였다.
도산급문제현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록인데, 편찬 과정에서 공정을 둘러 싼 적지 않은 시비가 있었다. 하회에는 퇴계의 문인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풍산류씨(豊山柳氏)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도산급문제현록』에 두 현조(顯祖)에 대한 언급에서 오류가 있어, 본 단자를 발급하여 급문록 편찬자들을 성토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13년경 慶尙北道 安東郡 河回의 유림이 陶山書院에서 편찬 중인 『陶山及門諸賢錄』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성토하고자 경상북도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단자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13년경 慶尙北道 安東郡 河回의 유림 柳蘭榮·柳道弼·柳弘睦·柳喬榮·柳萬植·柳先夏·柳永佑 등이 경상북도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단자이다. 이 단자는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安東河回單子」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단자의 발급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1913년 12월 20일 하회 유림이 발급한 단자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본 단자의 발급 시기도 1913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 단자에서 하회의 유림은 陶山書院에서 편찬 중이던 『陶山及門諸賢錄』을 성토해 놓았다. 退溪 李滉[1501~1570]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오류가 많으며, 무엇보다 謙菴 柳雲龍[1539~1601]과 西厓 柳成龍[1542~1607]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문제점이 많아, 두 인물의 후손인 안동군 하회의 豊山柳氏 가문이 강렬하게 반발하였던 것이다. 우선 『도산급문제현록』 간행과 관련된 갈등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퇴계 문인록으로 蒼雪齋 權斗經[1654~1726], 퇴계의 후손 靑守淵 李守淵[1693~1748], 山後 李守恒[1695~1768], 廣瀨 李野淳[1755~1831] 네 사람이 시차를 두고 작성한 草稿를 바탕으로 1913년 편찬을 시작하여, 1914년 간행된 初刊本이다. 이 네 사람의 문인록을 四家本이라 하는데, 1914년 초간본을 간행할 당시 사가본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 40여 명을 續錄으로 구분하여 수록하였다. 이리하여 총 309명의 문인들이 초간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도산급문제현록』 초간본은 등재된 인물들의 급문사실에 대한 신뢰성, 그와 관련된 기술내용의 적절성과 정확성 등을 둘러싼 시비가 간행 직후부터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편찬 과정에서부터 나타난다. 편찬 작업은 1913년 4월부터 진행되었는데, 門會를 시작으로 자료를 모으고 확인한 뒤, 교감하는 과정을 거쳤다. 교감 작업은 초고를 일일이 읽고 논변을 하면서 添書·改正·刪去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문인에 대해서는 姓名·字·號·本貫·居住地·生年, 그리고 퇴계와의 관계, 관력을 비롯한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퇴계와의 사제관계를 뒷받침하는 詩·書·輓·祭·錄 등 증빙자료를 제시하여 놓았다. 이렇게 해서 초간본 완성되었지만,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지역 및 문중 간의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교감을 맡은 인사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 단자를 작성한 하회의 풍산류씨들은 『도산급문제현록』 편찬 과정에서 이의 제기를 가장 강력하게 한 곳으로, 나중에 초간본이 완성되자 이것의 회수와 간행 판목의 훼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안동하회단자」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자에서는 먼저 程夫子가 말한 "비록 천하에 공변된 일이라도 만일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면 곧 私가 된다"를 인용해 놓은 뒤, 지금 『도산급문제현록』 간행의 거사가 그것에 가깝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이 급문록은 각 가문의 서적 속에 300년 동안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작성하니, 여러 선배가 이를 세밀하고 신중히 여겼으며, 극도로 어렵고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 하였다. 또 차례대로 선현들이 道統의 전래를 밝혔고, 먼저 同門의 우정을 講하여 가르쳤으니, 또한 엄하고 크게 공정하여, 지극한 바름이 반드시 이루어져 拱璧의 完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대개 급문한 후손이 마땅히 합석하여 이를 敦篤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전까지 나왔던 퇴계의 급문록은 선배들이 公議를 거쳐 작성한 것임을 상기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퇴계의 본손 4~5인이 제멋대로 勘校하고 손수 편집하여 급문록을 편찬하고 있으니, 거기에다 筆削한 것은 공을 빙자하여 사사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하회의 현조인 겸암의 각주에 "원근의 士子들이 당초에는 의귀해야 할 곳을 몰랐는데, 공이 유독 앞장서서 선생의 문하에 입문했다[遠近士子 初不知依歸 公獨首先負? 登門]"라는 17자를 편찬자들이 創出하여, 매우 미안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누차 爭辨하였고, 중간에 對同해서 歸正하려고 한 것이 없지 않으니, 마침내 反辭를 집요하게 따르고 조금도 돌아보거나 기탄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이 문장은 서애가 찬한 겸암의 墓誌銘에 나오는 것으로, 가히 鬼神에게 질정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고 백세가 지난 뒤에도 의혹할 것이 없는데, 한 자를 刪減하여 극도로 미안한 일이라고 하였다. 즉, 서애가 찬한 묘지명의 문구가 있음에도 이를 잘못 수록한 편찬자들을 비판해 놓은 것이다. 또한 『退書節要』의 간행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양 선조에 대한 주석은 大山翁 李象靖[1711~1781]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이상정이 편찬한 『李子書節要』를 가리키는데, 거기에도 양 선조에 주석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겸암서애에 대해서는 여러 선현이 퇴계와의 관계를 설명한 주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문록 편찬자들이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성토하는 본 단자를 발급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단자는 향촌사회에서 진행 된 鄕戰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는 鄕權을 둘러싸고 여러 형태의 鄕中 갈등이 있었는데, 이를 향전이라고 한다. 향전은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향권을 둘러싸고, 黨色 간, 嫡庶 간, 그리고 가문 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20세기 이후에도 지속된 것은 가문 간에 전개된 향전이었다.
조선후기 이후 부계 중심의 종족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각 가문은 경쟁적으로 조상추숭사업을 진행하였다. 顯祖의 권위를 재활용함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향촌에서의 지위도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추숭사업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우열의식에 따라 다른 가문과 여러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추숭하는 현조의 師承關係, 동일한 스승에게 수학한 현조의 位次 문제, 기타 문자시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본 단자는 그 중에서도 사승관계와 문자시비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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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安東河回單子【柳蘭榮柳道弼柳弘睦柳喬榮柳萬植柳先夏柳永佑
仰瀆僉尊鑑伏以程夫子有言曰雖公天下之事以
私意行之便是私今者陶山及門錄刊行之擧不其
近乎此錄之藏在各家巾衍三百年未遑豈非諸先
輩審?之極難重之甚者乎序賢而以明道統之傳
體先而以講同門之好克謹且嚴大公至正必成拱
璧之完書是固及門後承之所當合席敦事而何乃
老生先本孫四五人擅自主張勘校編摩旣失孔子
家語
之體又非理學通錄之例而低鼎筆削惟意之
適是所謂憑公而逞私者耶第以謙菴先祖註脚下

遠近士子初不知依歸公獨首先負?登門十七字
創出未安之說累次爭辨不無中間對同歸正而末
乃反辭執拗遂非不小顧忌此實西厓先祖所撰
祖墓誌中語也可以質鬼神而無疑俟百世而不惑
有未安之說而一字刪減則反極未安鄙先祖自處
之外無他道理而何以曰自處處之以此錄未遑之
前日不亦可乎且退書節要刊行已久兩先祖諱註
載在大山翁手筆自可以傳信來世玆敢奉還先諱
控由仰告固知駭忘之難?而實係於不得不爾雖

曰自外於是錄而豈敢自外於陶山耶伏願僉尊諒
察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