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경 慶尙北道 慶州郡 良洞의 유림이 慈仁壇所의 偸葬 무덤을 파내기 위한 대책 논의를 하고자 경상북도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0년(광무 4)경 慶尙北道 慶州郡 良洞의 유림 李在白, 李能赫, 校理 李中久, 李錫佑, 李祖源, 進士 李纘久 등이 경상북도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慶州良洞來門」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통문 발급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1900년 11월 23일 양동의 유림이 경상북도 禮安郡의 陶山書院 측에 발급한 통문이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어, 본 통문의 발급 시기도 190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양동래문」은 慶尙監營 아전 鄭在學이 慈仁壇所에 偸葬한 관계로 1901년 1월 23일 자인단소에서 이를 파내는 대책을 논의하고자 발급한 것이다. 당시 경상북도 慈仁郡에 위치했던 자인단소는 원래 晦齋 李彦迪[1491~1553]을 祭享한 觀瀾書院이었다. 이 서원은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 때 철폐되었기에 유림들이 그 유허에다 단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경주군의 양동은 이언적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는 관계로 정재학의 투장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주양동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斯文을 變極함은 예나 지금이나 듣지 못한 바로 이 일이 유림과 관계되어 있어 멀고 가까운데서 모두 분개하고 있다고 하였다. 자인군에 소재한 관란서원은 곧 우리 선조 文元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서원이 철폐되고, 위패를 땅에 묻은 후, 數畝의 遺墟에다가 하나의 壇?을 설치하여, 사림이 尊守하고 愛護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뜻하지 않게 올 가을 營人 정재학이란 자가 위패를 묻을 곳을 파내고, 거기다가 방자하게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大賢의 위패를 묻은 곳은 얼마나 중대한 곳이며, 많은 선비들이 추모하는 곳은 얼마나 존엄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저 보잘 것 없는 吏背가 감히 義를 모멸하는 행동을 저질렀으니, 세상이 이러한 極變을 용납할 수 없고, 크게 분통해 하는 일이라며 규탄해 놓았다. 이에 우리는 本鄕의 사림과 함께 營門에 가서 呈訴하였는데, 영문은 지도를 그려오라는 題音을 내렸다. 또 앞서 道儒 몇 사람이 이 변고를 듣고 정소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그때의 뎨김과 이번의 뎨김이 같았기에 즉시 그 자리에서 도내 同室에다가 두루 仰通하여 땅을 파낸 것을 성토하는 바탕으로 삼았고, 우선 영문의 決處를 기다렸다가 어떻게 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觀察使가 遞歸되어 호소할 곳이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다시 앉아 새로운 관찰사가 내려오는 날을 기다리고만 있으니, 공연히 세월만 낭비하고 시간을 끈 지 오래 되었음을 한탄하였다. 이어 목이 끊겨 있고 배가 터져 있는 더러운 무덤은 파내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정수리는 밟아서 마멸되어 버린 重地는 보존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급하게 이 모임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모임은 한 해가 다하는 섣달의 지극한 추위 때문에 내년 정월 23일 자인단소에서 가진다고 하였다. 통문 말미에는 이 자리에서 여러 사림이 함께 共憤하고 투장한 무덤을 파내는 것에 힘써 보자고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산송은 조선후기 이후 유교적 상장례가 사회 전반에 정착되고, 경제적으로 산림의 가치가 증가하는 시대적 추세에 따라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본 자료의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투장 장소가 위패가 묻힌 단소였기 때문에 제향자의 후손이 함께 산송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