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慶尙北道 金泉郡의 鑑湖堂會 유림이 呂大老를 祭享하는 祠宇 건립에 대하여 의견을 묻고자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20년 慶尙北道 金泉郡의 鑑湖堂會 유림 金瀚永, 李升義, 李能珪, 崔昌燮, 參奉 姜泰欽, 進士 鄭弘默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鑑湖堂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통문의 발급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1920년 1월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발급한 통문이 慶州 玉山書院에 소장되어 있어, 본 통문의 발급 연도도 1920년으로 추정된다.
통문은 감호당회 측이 鑑湖 呂大老[1552~1619]를 祭享한 祠宇 건립에 대한 의견을 묻고자 발급한 것이다. 원래 여대로는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에 위치한 鏡陽書院에 제향되었었는데, 경양서원은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고 말았다. 이에 여대로의 星山呂氏 후손들과 지역 유림이 주축이 된 감호당회 측이 사우 건립을 추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유림의 의견을 묻고자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감호당회중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尊賢·衛道·?性의 장소인 사우는 公議를 기다렸다가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여대로 선생은 도덕과 문장에 있어 선비들이 모두 존중하고 숭앙하던 분인데, 지난 번 서원훼철령으로 제향하던 곳이 철폐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그를 모시던 곳이 황패해져 草木이 무성하게 되었으니, 後學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도리가 흥하고 쇠함에 관계되어 있으니, 유림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선현을 호위하는 정성이 희박하다는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세태를 되돌아보면 聖人의 학문은 거의 실추되고, 공부하는 곳은 모두 무너져버려,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 선현의 道學이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태의 변화를 탄식한 후, 이어 사우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자신들은 여대로의 古宅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평소 그에 대한 사실을 보고 들어 존중하고 사모하였는데, 제향하던 곳이 퇴락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근래 소식을 들어보니 여대로의 본가 자손들이 재물을 모아 서원의 옛터에 사우를 건립하고 해마다 한 번씩 제향을 지낼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선현을 호위하려는 정성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손이 사사로이 廟宇을 지어 不遷位를 둔다는 것은 중대한 儀式을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니 마땅한 것이 아니라면서, 비록 사림에서 받들던 사우도 이미 훼철되었다가 다시 건립하게 되면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사우 건립이 신중한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영남에서는 예로부터 사적으로 불천위를 세우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것은 사림의 公議를 바탕으로 해서 행한 것이라고 하여 사우 건립에 유림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사우 건립을 오로지 여대로의 후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기에, 사림의 의론을 기다려 결정하기로 하고, 이렇게 도내 각처에 사우 건립과 관련된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통문 말미에서는 선현을 앙모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니, 도동서원의 여러분들도 한목소리로 응하여 막중한 대사가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여대로의 학문이 다시 세상에 빛나고, 우리들도 귀의할 곳을 가지게 되어 세상의 교육이 떨쳐 일어날 것이며, 유가의 학술 또한 진흥될 것이니 빠른 회답을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院祠의 복설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