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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19년 「자계서당래문(紫溪書堂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19.2771-20180630.Y1850302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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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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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자계서당,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19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19년 「자계서당래문(紫溪書堂來文)」
1919경상북도(慶尙北道) 청도군(淸道郡) 자계서당(紫溪書堂) 유림이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자계서당래문(紫溪書堂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통문은 당시 자계서당 측이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탁영집(濯纓集)』,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의 『삼족당집(三足堂集)』, 도연정(道淵亭) 김치삼(金致三)[1560~1626]의 『도연집(道淵集)』을 편찬하는데 있어서, 여러 유림이 의견을 묻고자 발급한 것이다. 통문에는 3인의 문집을 편찬하게 된 경위와 필요성 등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 무렵 문집 간행 절차를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19慶尙北道 淸道郡 紫溪書堂 유림이 金馹孫·金大有·金致三 3인의 文集을 편찬하는 일과 관련해 의견을 묻고자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19慶尙北道 淸道郡 紫溪書堂 유림 朴龍漢·金容復·金昌宇·金容煥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紫溪書堂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통문의 발급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慶州 玉山書院에 1919년 9월 자계서당이 발급한 거의 동일한 내용의 통문이 소장되어 있어, 도동서원이 수급한 「자계서당래문」도 1919년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계서당은 1871년(고종 8)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紫溪書院을 계승한 것이다. 당시 자계서당 운영을 주도하던 金海金氏 일족과 지역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濯纓 金馹孫[1464~1498], 三足堂 金大有[1479~1551], 道淵亭 金致三[1560~1626]의 문집인 『濯纓集』, 『三足堂集』, 『道淵集』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에 자계서당 측은 여러 유림에게 문집 간행에 대한 의견을 묻고자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계서당래문」의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김일손이 남긴 글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카인 김대유 世代 때부터였으나, 혹독한 災殃의 여파로 남은 글은 몸통에 붙은 깃털 하나, 살 한 점에 불과하다고 한탄하였다. 김일손이 戊午士禍 때 처형당한 관계로 문적이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사후 200년 뒤 문집 간행을 위한 판각을 시작하였는데, 나눈 條目과 그 차례가 朱子의 책에서 보인 例를 따르지 않고, 지금 통행되고 있는 여러 선생의 문집과도 다르다고 하였다. 또한 重刊 때 附錄의 文字 가운데 빠져나간 것들이 많으며, 실린 글 중에는 후생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뜻을 취한 것이 있어 慨歎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근 김일손의 和韻詩 48首와 疏箚 여러 편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孔子의 집 벽에서 古文이 나온 것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문집에 추가해 중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힘이 많이 들고 어려운 일이라서, 그렇게 할 겨를을 얻지 못하다가, 지금 다행히도 김일손의 후손 여러 집안이 단단히 마음을 먹고 계책을 합하여 부록을 추가하여 중간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조목들을 차례지우고 부록에 빠진 것들은 잘 정리하여 보충해서 한 권의 완전한 책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통문에서는 먼저 김일손 문집을 중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후, 뒤 이어 김대유·김치삼 문집의 편찬 경위도 설명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일찍이 활판으로 인쇄한 김대유의 遺集 또한 頭緖가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일손의 증손인 김치삼은 임진왜란 때 왜구와의 화친을 반대했고,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린 사실이 있는데, 이는 후세에 모범이 된다면서, 마침 火災를 벗어난 著述이 약간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문집을 동시에 함께 간행하려 하나, 일이 아주 중대하고 자신들로서는 감히 멋대로 결정할 수 없어, 이렇게 통문을 돌려 의견을 묻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높은 어른을 지키려는 타고난 마음은 같을 것이니, 특별히 가르침을 내려주고 도와서 斯文의 큰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고 있다.
자료적 가치
전통시대 先賢의 문집 편찬은 후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럴 경우에도 후손들은 문집 편찬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유림의 공론을 얻어 문집 편찬을 진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자계서당에서 선현 3인의 문집 편찬을 진행하던 모습도 그런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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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溪書堂來文【朴龍漢金容復金昌宇金容煥
右文爲通諭事伏以我濯纓先生遺文收輯在三足
堂先生
之世而酷禍之餘所存不過一羽一?其?
板始於二百年之後而門目次序不倣紫陽朱夫子
之書例乃與通行子集有異重?時附錄文字亦多
遺漏者凡我後蔑學之所未能知取義之何如而未
?不致慨矣挽近搜得先生?和四十八詠及?箚
諸篇於掌故中其爲不偶與璧之古文無異也事

當追附本集而役巨難據因循未遑者久矣幸今後
孫諸家銳意合謀追附而重?之旣爲重?之則門
目之秩序者附錄之有漏者不得不釐整之添補之
以爲一部完書三足先生遺集之曾所活印者亦有
頭緖未整濯爺曾孫道淵先生之龍蛇斥和昏朝棄
官足以矜式來後而著述之脫出於鬱攸者僅若干
篇爲同時幷?之計事甚重大以生等之孤陋蔑劣
不敢自擅?以稟議伏想尊衛之誠彛性攸同特賜
指敎而贊成之?敦斯文大事千萬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