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0월 慶尙北道 慶州郡의 玉山書院 유림이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景節公實紀』를 간행한 慶州孫氏 측을 규탄하고자 慶尙北道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5년(광무 9) 10월 慶尙北道 慶州郡의 玉山書院 유림이 慶尙北道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당시 옥산서원의 院長은 金奎華였으며, 有司는 金相益·李能?·權運興·任景泰가 맡고 있었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玉山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통문은 孫李是非와 관련해 慶州孫氏들을 규탄하고자 驪州李氏가 주축이 된 옥산서원에서 발급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옥산서원래문」에는 "文元公 李彦迪[1491~1553]은 景節公 孫仲暾[1463~1529]에게 친분으로 말하면 舅甥의 관계인데, 義方을 내려주었다거나 淵源이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道脈이랴! 지금 이 實紀를 중간하는 가운데 上樑門의 ‘義方’이라는 구절을 刊去하고, ‘淵源道脈’이라는 글자를 附註하였으며, 家狀과 追書에 원래 없는 휘호를 붙여 增刊해서, 장차 세상에 印布하려고 한다. 陶山書院에서 발급한 통문을 베껴서 첨부한다"라는 내용을 수록한 뒤 여러분께서 잘 살펴 봐 주기를 부탁해 놓았다. 여기서 본 통문에 첨부했다는 도산서원 발급의 통문은 본 자료 다음에 「陶山通玉山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문제가 된 손이시비는 경주군 良洞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가 자신들 顯祖의 학문적 연원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경주손씨의 현조인 손중돈은 여주이씨의 현조인 이언적의 외삼촌이다. 이언적은 어린 시절 외삼촌인 손중돈에게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경주손씨 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이언적의 성리학 연원이 손중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祭享한 東江書院의 廟宇 중건 때 李象靖[1711~1781]이 쓴 上樑文과 이언적이 손중돈을 위해 썼다는 狀文과 輓詞이다. 경주손씨 측은 이 가운데 이상정이 쓴 상량문에 ‘의방’이라는 자구와 ‘연원도맥’이라는 자구를 근거로 두 사람이 사승관계라고 주장하였다. 또 장문과 만사는 1904년(광무 8) 여주이씨 종택인 無?堂에서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여주이씨 측은 이 사안에 대하여 꾸준히 경주손씨 측이 함부로 자구를 붙인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5년 경주손씨 측이 위의 상량문과 장문 및 만사를 수록해 놓은 『景節公實紀』를 간행하자, 손이시비는 더욱 격화되었고 양측은 각기 여론전을 펼치게 되었다.
자료적 가치
손이시비는 조선후기부터 진행된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鄕戰이다. 이 향전은 재지사족 가문이 경쟁적으로 현조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현조의 학문적 연원, 사승관계, 위차 등을 높이면서 각 가문 간 우열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심화되면 향전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