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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05년 10월 「옥산서원래문(玉山書院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05.2771-20180630.Y185030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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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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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05년 10월 「옥산서원래문(玉山書院來文)」
1905년(광무 9) 10월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군(慶州郡)옥산서원(玉山書院) 유림이 경상북도 현풍군(玄風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 이후 도동서원 측이 수급한 각종 통문을 엮어 놓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옥산서원래문(玉山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옥산서원래문」은 경주군 양동(良洞)에 세거하던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 간에 전개된 손이시비(孫李是非) 때문에 발급된 것이다. 당시 경주손씨 가문은 자신들의 현조인 손중돈(孫仲暾)[1463~1529]의 행적을 담은 『경절공실기(景節公實紀)』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는 여주이씨의 현조인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학문 연원이 손중돈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여주이씨 측은 본 통문을 발급하여 경주손씨의 주장을 규탄하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05년 10월 慶尙北道 慶州郡玉山書院 유림이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景節公實紀』를 간행한 慶州孫氏 측을 규탄하고자 慶尙北道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5년(광무 9) 10월 慶尙北道 慶州郡玉山書院 유림이 慶尙北道 玄風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당시 옥산서원의 院長은 金奎華였으며, 有司는 金相益·李能?·權運興·任景泰가 맡고 있었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玉山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통문은 孫李是非와 관련해 慶州孫氏들을 규탄하고자 驪州李氏가 주축이 된 옥산서원에서 발급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옥산서원래문」에는 "文元公 李彦迪[1491~1553]은 景節公 孫仲暾[1463~1529]에게 친분으로 말하면 舅甥의 관계인데, 義方을 내려주었다거나 淵源이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道脈이랴! 지금 이 實紀를 중간하는 가운데 上樑門의 ‘義方’이라는 구절을 刊去하고, ‘淵源道脈’이라는 글자를 附註하였으며, 家狀과 追書에 원래 없는 휘호를 붙여 增刊해서, 장차 세상에 印布하려고 한다. 陶山書院에서 발급한 통문을 베껴서 첨부한다"라는 내용을 수록한 뒤 여러분께서 잘 살펴 봐 주기를 부탁해 놓았다. 여기서 본 통문에 첨부했다는 도산서원 발급의 통문은 본 자료 다음에 「陶山通玉山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문제가 된 손이시비는 경주군 良洞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가 자신들 顯祖의 학문적 연원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경주손씨의 현조인 손중돈은 여주이씨의 현조인 이언적의 외삼촌이다. 이언적은 어린 시절 외삼촌인 손중돈에게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경주손씨 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이언적의 성리학 연원이 손중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祭享한 東江書院의 廟宇 중건 때 李象靖[1711~1781]이 쓴 上樑文과 이언적손중돈을 위해 썼다는 狀文과 輓詞이다. 경주손씨 측은 이 가운데 이상정이 쓴 상량문에 ‘의방’이라는 자구와 ‘연원도맥’이라는 자구를 근거로 두 사람이 사승관계라고 주장하였다. 또 장문과 만사는 1904년(광무 8) 여주이씨 종택인 無?堂에서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여주이씨 측은 이 사안에 대하여 꾸준히 경주손씨 측이 함부로 자구를 붙인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5년 경주손씨 측이 위의 상량문과 장문 및 만사를 수록해 놓은 『景節公實紀』를 간행하자, 손이시비는 더욱 격화되었고 양측은 각기 여론전을 펼치게 되었다.
자료적 가치
손이시비는 조선후기부터 진행된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鄕戰이다. 이 향전은 재지사족 가문이 경쟁적으로 현조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현조의 학문적 연원, 사승관계, 위차 등을 높이면서 각 가문 간 우열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심화되면 향전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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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書院來文【院長金奎華有司金相益李能?權運興任景泰乙巳十月日】
伏以文元公之於景節公親爲舅甥賜有義方而淵
源則未聞矣況道脈乎今此實紀重刊中樑?文刊
去義方句而淵源道脈字原附之增刊家狀而追書
元無之諱?將以印布于世今自陶院發此文通玆
以謄恥仰告伏惟僉尊大義攸同俯覽諒悉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