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의 내용
1898년(광무 2)경 慶尙北道 尙州郡의 愚山修契所 유림 姜斗馨·黃甲周을 필두로 製通 李時佐·柳海鵬·廉炳憲·金一欽·南啓運·高?·韓楨國 등이 경상북도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尙州愚山修契所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의 발급 시기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1898년에 발급된 통문이 『각처통문등초』 제1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통문 서두에 道南壇所에서 발급한 통문을 언급하였는데, 이 통문이 1898년 도남단소에서 도내 여러 향교와 서원에 발급한 통문으로 추정되는 관계로 본 「상주우산수계소래문」도 이에 대응하고자 1898년에 발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우산수계소래문」에서 우산수계소 측은 도동서원에 도남단소의 『愚伏先生年譜』 별도 간행은 부당하다고 호소해 놓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상주군 愚山에 세거하는 晉州鄭氏 愚伏 鄭經世[1563~1633] 후손과 安東郡 河回에 세거하는 豊山柳氏 西厓 柳成龍[1542~1607] 후손 간에 발생한 것이다. 갈등의 가장 큰 요인은 본 통문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정경세 연보인 『우복선생연보』에 대한 文字是非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정경세 후손은 우산수계소, 그리고 류성룡 후손은 屛山書院과 도남단소를 중심으로 여론전을 펼쳤다.
우선 두 가문 간 갈등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정경세의 黨色은 南人이지만, 그의 둘째 사위는 西人 山林 同春堂 宋浚吉[1606~1672]이었다. 정경세 사후, 그의 연보는 송준길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송준길이 작성한 연보에는 정경세의 학맥과 교유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남인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송준길의 당색이 서인이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정경세의 후손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정경세의 문집에 송준길이 작성한 연보를 쉽게 수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송준길을 배향한 黔潭書院에서, 송준길의 문집인 『同春堂集』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송준길이 작성한 『우복선생연보』가 수록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黔潭本 또는 同春本이다. 그러다 1821년(순조 21) 정경세의 후손들이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저본은 동춘본이었다. 동춘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정경세의 스승인 류성룡을 표현하는데 있어, ‘先生’이라 칭하지 않고, 단지 諡號와 別號만으로 류성룡을 호칭했기 때문이다. 남인들 중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문구상의 失禮가 아니라, 서인인 송준길이 류성룡을 폄하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남인은 단연 류성룡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의 반발로 1821년의 『우복선생연보』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류성룡의 후손들은 향후 이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庚寅年인 1830년(순조 30) 정경세의 후손들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과 합의하여, 류성룡을 ‘先生’이라 칭한 『우복선생연보』를 간행하였다. 이것을 상주군의 靑龍寺에서 간행했다고 하여, 靑龍本 또는 庚寅本이라고 부른다. 이 모임에는 1821년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주도했던 鄭象晉[1770~1847]과 鄭象履[1774~1748]도 참석하였다. 한 동안 잠잠하던 연보 간행 문제는 1896년(고종 33) 우산의 정경세 후손들이 정경세의 문집 別集 重刊을 시도하면서 재연된다. 별집의 초간본에 정경세의 사실관계가 모두 수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는데, 별집 중간본에 포함된 연보의 저본이 청룡본이 아니라 동춘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다시 발생하였다. 이에 류성룡 후손들이 반발하게 되고, 양 가문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통문을 각각 영남 列邑에 발급하며, 시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본 통문은 두 가문 간이 여론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898년경 발급된 것으로 보이는데, 우산수계소 측은 통문에서 별집의 연보 간행이 부득이 한 점, 하회 류씨의 주장이 과격하다는 점, 무엇보다 도남단소에 대응하여 별도로 진행되는 연보 간행이 부당하다는 점을 호소해 놓았다. 특이점이 있다면, 갈등의 가장 큰 요인인 ‘선생’이란 문자시비는 일절 않고, 연보를 새롭게 편찬해야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주우산수계소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통문 서두에는 지난번에 우리 고을 士友가 도남단소에 모여 향교와 함께 논의하여 여러 군자들께 크게 아뢴 적이 있는데, 그 일은 정경세의 연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義는 同室의 사람이 몹시 바쁘게 진행한 모양이라고 평가해 놓았다. 실제 도남단소 측은 1898년 3월 정경세 후손이 주도한 별집 중간본 대신 별도의 연보를 간행하겠다며, 도내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서원 등지에 통문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본 통문에서 도남단소가 크게 아뢴 것은 이때의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남단소의 전신인 道南書院에는 류성룡과 정경세를 비롯해 여러 선현 祭享되었었지만, 류성룡 후손의 영향력이 컸기에 이번 문자시비가 진행되는 동안 도남단소 측은 전반적으로 하회 류씨의 의견을 반영하여, 갈등의 중재안을 제시하면서 여론전을 펼쳤다는 점이다. 이어 통문에서는 당시 도남단소가 크게 아뢴 말은 연보를 둘러 싼 갈등과 관련하여, 和平을 구하기 위해 발급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의의가 있으니, 사실 관계에서 함축된 것이 많다고 하였다. 도남단소 통문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사실관계를 이번 통문에서 언급하니, 여러 분들이 보시고 잘 살펴봐 달라고 당부해 놓았다.
이에 먼저 송준길의 手本, 즉 송준길 편찬의 연보는 그가 정경세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 글도 믿을 만하나, 師門의 성대한 자취에 疏漏한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後生이 함께 한탄하는 바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루했던 내용 14개조를 우리 선배들이 논의해서 補遺하였고, 지금의 2개조는 兩家에서 상세히 논의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의 14개조와 지금의 2개조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조목들은 구본의 소루한 내용으로 중간이 필요한 사유로 추정되며, 이 통문의 기조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큰 논란인 ‘선생’이란 문자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어 논의가 되는 과정에서 懷德의 恩津宋氏와 의견을 모은 것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이 新刊을 나라에 유포하기에 이르렀으며, 여론이 창송하고 있으니, 실로 사문의 큰 다행임을 강조하였다. 1896년부터 진행된 별집 중간의 당위성을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하회의 류씨와 어긋나고, 그런 여론이 격해져, 마침내 청룡본의 별간을 추진하고 있으니, 이는 吾黨이 양분된 까닭이기에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정경세 후손이 하회 류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별집을 중간하려 하자, 하회 류씨와 도남단소에서 별도로 1830년에 간행한 청룡본 연보를 재간하려 함을 지적한 것이다.
통문 후반부는 原本, 즉 이전 연보의 소루함과 청룡본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하회 류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별집을 중간해야 하는 당위성을 나열해 놓았다. 역시 여기서 재차 주목할 점은 하회 류씨가 반발하는 가장 큰 요인인 ‘선생’이란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논란의 쟁점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자신들은 이따금 원본을 奉覽했는데, 온당치 못한 점을 적지 않게 발견하였고, 그 중에서 크게 未安한 점 세 가지를 제시하며 별집 중간의 당위성을 뒷받침하였다. 그 첫 번째는 이전 연보의 篇題를 新編이라 칭한 것이다. 이는 중간된 연보의 제목으로 편집 전례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 것으로, 별집 중간에서 바로 잡아야 할 점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先賢의 尊尙과 관련된 것이다. 송준길의 수본에는 圃隱 鄭夢周[1337~1392], 寒暄堂 金宏弼[1454~1504], 靜菴 趙光祖[1482~1519], 退溪 李滉[1501~1570]을 ‘선생’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간행하면서 모두 刪去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차례와 序次, 그리고 선현의 체면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月澗 李?[1558~1648]과 蒼石 李埈[1560~1635] 二老는 차례를 바꾸어 기재하였고, 黔澗 趙靖[1555~1636]과 沙溪 金長生[1548~1631]은 姓과 諱를 그대로 直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 세 가지 미안한 점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정경세의 公私 撰實關係는 신중하게 쓴 부분이 많아, 오히려 중요한 사실이 刪沒된 것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연보가 任員을 정해 일을 주간하게 하지 않고, 여러 사우의 교정과 교감을 거치지 않은 채, 窮山의 사찰에서 몰래 간행하여, 한반 중에 河北의 奴僕 집으로 옮겼으니, 이는 결코 존현의 도리가 아님을 강조해 놓았다. 청룡본 연보의 내용상 문제뿐만 아니라, 편찬 과정의 문제도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어 통문 말미에는 이러한 과정에서 하회 류씨의 조치는 일을 오히려 일을 어그러뜨리는 일임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두 가문 간의 갈등이 더 커지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大賢의 연보가 두 개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여러 분의 올바른 평가를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이후 광범위하게 전개된 鄕戰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향전의 원인은 黨色 간의 갈등, 嫡庶 문제, 그리고 가문 간의 갈등으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문 간의 갈등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가문 간 갈등은 대부분 각 가문이 자신들의 顯祖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즉, 조선후기 이후 부계 중심의 宗族 의식이 정착되어 감에 따라, 각 가문은 문집 간행, 서원 및 祠宇 설립 등 다양한 조상추숭사업을 경쟁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경쟁적인 조상추숭은 곧 다른 가문 현조와의 우열의식을 낳게 되었다. 이런 우열의식은 주로 師承關係, 같은 스승에게 수학한 현조에 대한 位次, 스승과 제자 간의 문자 표기 등에서 갈등을 낳게 되었다. 본 통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갈등 양상도 스승과 제자 간의 문자 표기에서 비롯된 가문 간 향전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