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9월 25일 慶尙南道 居昌郡의 道山壇所 유림이 修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하여 慶尙北道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02년(광무 6) 9월 25일 慶尙南道 居昌郡의 道山壇所 유림 鄭台善·李光善·尹?夏·李浚鶴 등이 慶尙北道 玄風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발급한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居昌道山壇所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서 도산단소는 設壇과 修契에 도동서원의 참여를 요청해 놓았다. 도산단소는 金宏弼[1454~1504]·鄭汝昌[1450~1504]·鄭蘊[1596~1641]을 祭享하던 道山書院이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면서 설치된 것이다. 도산서원 철폐 이후 지역 유림은 先賢의 추모를 이어가고자 단을 설치하고 계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본 통문을 발급하여 미훼철 서원이었던 도동서원 유림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도동서원도 김굉필을 제향하고 있었기에 도산단소 측은 제향 인물이 같다는 연고로 본 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거창도산단소래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우리 고을의 도산서원은 지금 폐허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현의 精彩를 징험할 수 없고, 후학이 추모할 곳이 없으니, 수 백 년 제향이 이루어지던 장소는 鐵爐步, 즉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탄하였다. 또한 지금 그곳에는 농사짓는 자들과 堪輿하는 자들이 들락거리고 있으니, 고을의 士類로서 그 수치가 극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에 廟宇가 훼철되면 단소를 세우고, 옛 제도에 따라 계를 결성하는 것이 근래의 규례이기에 자신들도 이를 추진하려 했음을 밝혀 놓았다. 하지만 세도가 점점 떨어지고 고을의 의론이 원만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지체되어 오다가, 이제야 계획한 바가 이루어지려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간 도동서원 측이 같은 뜻으로 面敎와 文字로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올 가을 이런 논의를 거쳐서 설치된 단은 社?의 옛 제도를 모방하였고, 계는 도동서원의 遺規에 의지해서 약간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통문 말미에는 貴鄕 章甫들의 은혜에 감사해 하며, 계를 더욱 빛내고 영원히 단소를 지켜 나가기 위하여, 도동서원 유림의 名錄, 즉 계에 이름을 올리고 참여해 주기를 요청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흥선대원군 집권기 이후 서원의 운영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과 사우를 제외한 나머지 사적인 제향 시설을 모두 철폐하였다. 이때 사액서원이었던 거창군의 도산서원도 철폐되었다. 그런데 서원은 제향 시설이자, 향촌사회 내에서 재지사족의 지위 유지와 관련된 자치기구이기도 했기에,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많은 서원들이 복설되었다. 이때 재지사족들은 먼저 단소를 설치하여 제향을 지속하였고, 계를 결성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해 순차적으로 서원을 복설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연고가 있는 서원 또는 문중에게 통문을 보내어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