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9월 19일 慶尙道 星州牧의 檜淵書院과 晴川書院에서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에 思悼世子 追尊 上疏를 논의하는 장소와 일자를 알리기 위하여 발급한 通文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55년(철종 6) 9월 19일 慶尙道 星州牧에 소재한 檜淵書院·晴川書院의 유생 李源祐·金昊誠·宋天欽·鄭五錫 등이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星州檜淵晴川兩書院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통문에는 오는 道會 개최 장소와 일자를 통고해 놓았다.
「성주회연청천양서원래문」에서 회연서원·청천서원 측은 먼저 尙州牧의 玉洞書院 등에서 수급한 통문을 바탕으로 再疏의 여론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본 통문에서 어떠한 상소 활동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다만 통문 서두에 지난 번 疏擧, 즉 상소 활동은 우리 嶺南 사림들이 100년 동안 抱鬱해 하던 것을 드러낸 것이며, 재차 상소를 올리자는 의견이 준발하였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55년 5월에 올려 진 莊獻世子[1735~1762], 즉 思悼世子 追尊 萬人疏로 추정된다.
이어서 지난달 상소문을 재차 올리기 위하여 安東府의 鳳停寺에서 모임이 있었으나, 회원들 간에 여러 의견이 있어 원만하게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실을 상기 시키고 있다. 이에 별도로 안동부와 禮安縣에 通諭하여, 이 문제와 관련해 경상도에서 재차 도회를 개최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성주목에 통고되었는데, 성주목 유생들은 한 목소리로 참여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士氣가 크게 확장되었음을 특히 강조하였다. 통문 말미에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도회가 오는 10월 25일 陜川郡 소재 伊淵書院에서 개최된다고 통고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관련된 경상도 유생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도세자는 壬午禍變으로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아들 正祖는 즉위 후 아버지에 대한 신원과 추숭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時派와 ?派로 갈려져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런 가운데 甲戌換局과 戊申亂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경상도 유생, 이른바 嶺南 南人들은 사도세자 신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고 하였다. 이에 1792년(정조 16) 경상도 유생들이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를 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실추되었던 경상도 유생의 입지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가 올려 졌던 것이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가 올려 진 19세기 중반의 중앙 정치는 勢道政治가 심화되어 재지사족의 정계 진출을 어렵게 하였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변화로 향촌에서는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약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경상도 유생들은 사도세자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여, 1855년 5월 疏頭 李彙炳 등 모두 10,432명이 연명한 만인소를 哲宗에게 올렸던 것이다. 임오화변 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존호를 높인다는 명분이었다. 이에 철종은 批答 대신 承政院에 상소문을 돌려주라고 지시하여, 결과적으로 사도세자 추존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가 올려지고, 본 통문에서처럼 재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상도 유생의 결집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