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년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의 부조, 노비 추쇄, 물품 마련 기사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76년 기사다. 이 해의 기사에는 풍기군 관아의 부조, 향교 奴婢의 推刷, 祭儀 물품을 마련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2월 초2일 들깨 2두를 풍기군에서 보내왔다. 풍기군에 제출한 報狀에 의거한 것이다. 당시 豊基郡守는 朴千榮이었다. 釋奠祭 때의 巾服은 작년과 동일하게 착용하였다. 풍기향교 校奴 莫南은 향교를 배반할 계략을 품고, 올해 號牌를 만들 때 閑良으로 懸錄하였다. 이에 관에 보고하여 戶籍에다 막남과 그의 딸을 향교 노비로 다시 현록하였는데, 이때 관아에서 작성한 막남의 ?音은 향교에 보관하였다. 이 기사 다음에는 막남의 문제로 풍기향교 측이 풍기군에 올린 書目에 대하여, 2월에 풍기군수가 내린 題辭를 수록해 놓았다. 제사에는 막남과 그 딸을 향교 노비로 현록한다는 판결이 내려져 있다. 5월 풍기군에서 풍기향교로 松墨 15정을 보내 왔다. 이때도 풍기군수는 박천영이었다. 8월에는 鍮燭臺 6柄, 大鼎 1坐, 中鼎 1좌, 釜 1좌를 措備하였다. 당시 풍기향교 都有司는 南?, 掌議는 許之潁이 맡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1676년의 기사에서는 관의 향교 운영 지원과 향교 노비의 존재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향교는 지방의 官學으로서 관의 협조 하에 운영되었다. 특히 향교의 장려는 守令考課 중 하나인 ‘興學校’에 해당되었기에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향교 운영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에 지방관은 수시로 물력을 지원해 주며, 향교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였던 것이다.
한편, 노비는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이들은 자신을 소유한 향교에 물력 또는 노동력을 제공하던 존재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노비의 양인화가 증가하게 되면서, 많은 노비가 향교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풍기향교 교노 막남이 신분을 한량으로 상승시켜 향교 노비에서 이탈한 것도 그러한 양상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