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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6년 10월 생원(生員) 한원진(韓元璡)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46.4721-20170630.Y172190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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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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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46
형태사항 크기: 32 X 26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6년 10월 생원(生員) 한원진(韓元璡) 등 상서(上書)
1646년 10월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의 유생(儒生)인 생원(生員) 한원진(韓元璡) 등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향교 이건(移建)을 청원하기 위해 올린 상서(上書)다. 이 상서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잡록(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상서에서 한원진 등의 풍기향교 유생들은 대성전(大成殿)의 불합리한 입지 조건 때문에 이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대성전이 위치한 곳의 지세가 너무 낮아, 대성전 동·서·북쪽으로 조성된 논밭의 두둑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논밭의 물이 지세가 낮은 대성전 쪽으로 흐르니, 건물의 기둥이 쉽게 썩고 기울고 있었으며, 사람과 가축의 오물도 대성전으로 흐르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대성전 옆으로는 읍내의 사람들이 땔나무를 구하고 소를 치러 가는 길이 나 있어서, 항상 소란스러워 신성한 대성전에 매우 민망한 상태라며, 상서를 통해 서쪽 100여보 지점으로의 이건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경상도관찰사는 향교 이건이 중요한 사안이기에 조사 후, 정부에 보고를 올리겠다는 내용으로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상서에서 확인되는 풍기향교 유생들의 향교 이건 청원은 조선시대 관(官)의 지원과 협조 하에 운영되는 지방 관학(官學)의 존재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한 사례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雜錄」에 수록 1646년 10월 풍기향교 生員 韓元璡 등의 향교 이건 청원 上書
자료의 내용
1646년 10월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의 儒生인 生員 韓元璡 등이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上書다. 이 상서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한원진을 비롯한 풍기향교 유생들은 경상도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려 향교 移建을 청원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풍기향교 유생들은 먼저 경상도관찰사가 일전에 풍기향교를 방문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경상도관찰사풍기군을 巡行할 때, 풍기향교를 방문해서 聖廟, 즉 大成殿을 배알한 후 향교를 둘러보았는데, 향교의 상황이 여러모로 누추함을 확인하고 안타까워 했었다는 것이다. 풍기향교 유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킨 후, 바로 풍기향교의 열악한 환경을 나열해 놓았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풍기향교의 가장 큰 문제는 입지 조건이었다. 전반적으로 지세가 낮아 인근 논밭과 도로의 행인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즉, 대성전의 동·서·북 3면에 위치한 논밭의 두둑이 모두 대성전 처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논밭의 물이 廟廷으로 흐르는 형세였다. 또 읍내에는 300여가가 있는데, 이들이 小白山을 향해 땔나무를 구하거나 소를 치러 갈 때에는 반드시 대성전 구석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다. 이들이 새벽같이 노래를 부르며 성인을 모신 대성전 옆을 지나가니, 그 소란스러움으로 의해 매우 민망한 형세라고 하였다. 특히 봇도랑의 물이 廟廷으로 흐르니, 건물 기둥이 쉽게 기울고 썩고 있으며, 심지어 사람과 가축의 오물도 스며드는 상황임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풍기향교 서쪽 100보 지점에는 옛 향교의 터가 있는데, 땅의 위치가 고결하여 가히 儒宮이 될 만한 곳이어서 대성전을 이건하기 적당하지만, 100년 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새로 부임한 豊基郡守가 처음 풍기군에 왔을 때, 풍기향교 대성전을 배알하고 건물을 둘러 본 후 건물 중수를 결정하였다. 이에 工匠을 부르고 목재와 석재를 준비하였으나, 풍기향교 유생들이 생각하기에 중수는 한 때의 조치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중수를 해도 불과 10년 안에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서 단청과 처마가 더럽혀질 것이고, 기둥은 썩고 기울게 될 것이며, 지금 돈을 쓰고 나중에 또 돈을 쓰는 일이 될 것이니 이는 낭비라고 하였다. 지금 이건하지 않으면 10년 내에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이건 건의는 고을 사람들이 彛倫을 알기에 청원하는 것이지, 절대 風水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풍수설에 의거해 향교를 이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언급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풍기향교 유생은 대성전 이건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하였고, 상서 마지막에는 현재 풍기향교의 재물이 많이 부족하니 경상도관찰사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청원하였다. 본 상서의 呈文有司는 安世亨黃龍淵으로 확인된다.
상서 다음에는 이 상서에 대한 경상도관찰사의 題辭를 수록해 놓았다. 제사에서 경상도관찰사는 상서 서두에 언급되어 있듯이, 본인도 일전에 풍기향교 대성전을 둘러보았고, 그 입지의 불합리성과 이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성전의 이건은 막중한 일이기에 유림이 올린 상서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풍기향교를 奉審한 牒報를 받은 후에 조정에 啓聞할 것이라고 답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본 상서에서 확인되는 풍기향교의 이건 청원의 진행 과정은 官과 향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향교는 지방 官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그 운영에 있어 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특히 향교의 장려는 守令考課 중 하나인 ‘興學校’에 해당되었기에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에 향교 이건처럼 큰 물력과 노동력이 필요한 사업이 있을 경우, 풍기향교의 사례처럼 지방관뿐만 아니라 해당 道의 觀察使에게도 지원 및 협조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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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十月日儒生生員韓元璡等謹齋沐百拜上書于
巡相閤下伏以生等伏覩前者閤下巡臨弊校祗謁聖廟之餘深嘆
廟宇之卑湫軫念齋舍之傾頹其扶植斯文之盛尋常滿
滿生等相與感嘆而私語曰相公之言如此弊校之興此其時凡因
?以平日之素所蓄慮已未攄者瓦閤下開焉此所謂伸於
知己也伏願垂察夫弊校之汚下隘陋已悉於閤下一顧衙之頃
生等抽發其最所關切者陳之聖廟之東西北三面卽皆稻田
田內稻田之畦壟實與聖廟之?瓦齋所西?之?等有大抵於
稻田之畦壟稻田之水陸漏於?下之廟庭同其勢也邑居三百餘
家樵牧之大路又由於聖廟西?之隅稻田之畔阻路一郡
齋民蒙黎小白山不可移也不可廢也樵童牧竪晨日歌
呼於聖廟之?隅喧然之聲相激於廟因而不可禁凡擧
趾春夏之時潺澮分田之自?水相流於廟庭濕氣■所因

易致棟樑之傾腐人畜之所附未免穢氣之侵及較之村
開尙不敢安況此莫大妥靈之所所乎弊校之西百步之地有
舊鄕校遺址地位淸高洞府幽靜眞所謂天作儒宮之
所當日之舍彼移此雖未知其急而以今論之彼勝於此豈特
百倍而已哉生等欲爲移建舊址之計積百年所而拘於時
勢到今未就仍寸誠而已幸今維我地主於赴任之初首
謁聖廟目見?堂之頹廢慘然有重修之志當務?
之日區劃經始之制工匠已擧木石成具實學校重興之
秋而生等?以爲今雖有重修之擧卑濕之地不過十年定未免
傾?之復如今日也與其今日重修又後日重修曷若一費切
力永建不拔之地爲愈也此非生等之臆料試以免往之事
觀之啓達重修今未十年而?陰所侵丹?漫??楹
已故此亦閤下達觀之所已周者今不移建則未過十年又未免
重修之役此又不可不念者也?念重修與移建唯或功力
之有間而往來之利害免如此聖廟之擇地又如彼則欲因重
修之擧敢爲移建之計此生等之不謁聖廟況此移建之地
本一舊基而相距不遼則其間規劃之謀設施之功又不▣
創卜遠地之爲難者乎噫生等生長窮鄕蒙無知識而一端
秉彛之天尙不拮於尊奉聖廟內廟貌門墻依於田畝
之場混於閭巷之間誠以閤下前日洞察地勢
不宜學校之敎?已先獲生等之意也然則閤下之巡臨

弊校生等之遭遇閤下豈非移建聖廟之大機也生等敢此
爲特不願物力之殘弊不憚工役之誥繫披?赤巡齋聲
以?焉伏願閤下勿以末世崇信風水之例視之更思
閤下前日之所親覽者又采生等之素所願者從質啓聞
侵莫大之擧次以成就焉生等不勝惶恐懇析之至
呈文有司安世亨
黃龍淵
題音道行次巡到本郡時祗謁聖廟見其地勢之卑下
稻田之環有四方廟庭湫濕不合妥靈?見其廟宇傾
頹必切慨然思欲變通爲如乎今凡呈書則與道所見無異
是在果莫重聖廟移建之擧不可只憑儒生呈書而率聚
啓聞舊基留合移建與否焉連奉審後牒報以爲啓聞
稟置之地向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