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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1년 성묘(聖廟) 중수 일지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41.4721-20170630.Y172190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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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41
형태사항 크기: 32 X 26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1년 성묘(聖廟) 중수 일지
1641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소재 풍기향교(豊基鄕校)에서 진행된 대성전(大成殿) 중수 과정을 간략히 기록해 놓은 자료다. 이 자료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잡록(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기와 제작, 목재 운송, 이안(移安)·환안(還安) 등의 시역(始役) 및 필역(畢役) 일자와 공사 진행을 관리했던 도색(都色)의 성명, 남은 재료에 대해서는 향후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 중수 시 사용할 것이라는 결의 내용 등을 기재해 놓았다. 풍기군의 지시에 의해 기와 및 목재 운송에 속오군(束伍軍)과 관내 민간인이 동원된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지방 관학(官學)이었던 향교가 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41년 聖廟 重修 일지
雜錄
자료의 내용
1641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진행된 聖廟, 즉 大成殿 重修 과정을 간략히 기록해 놓은 일지다. 이 자료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일지에서 확인되는 1641풍기향교 대성전 중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성전 중수는 풍기군慶尙監營에 보고하고, 이어 慶尙道觀察使가 조정에 啓聞을 올리는 일련의 절차를 거친 후 진행되었다. 먼저 1641년 2월 초5일 경상감영 측이 풍기향교를 방문하였는데, 인근 醴泉郡醴泉鄕校 유생들도 倍來하였다. 중수에 앞서 경상감영풍기향교 대성전의 상태를 점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 제작은 3월 초7일 시작해 5월 21일 마무리되었다. 3월 30일 編伍軍에게 영을 내려 기와를 옮기게 했다. 세 개의 큰 가마, 椽木 142개, 棟梁으로 쓰일 大木 50여 주는 관내 各面에 분담시켜 옮겨오게 했다. 이때 燔瓦匠은 승려 6명이 담당 하였으며, 都色은 姜以亨, 庫直은 介金伊가 맡았다. 4월 26일 대성전을 허물고 위패를 移安하였다. 이안 때 地主, 즉 豊基郡守와 鄕先生 및 유생 50여원이 참석했다. 5월 초6일 시작된 공사는 6월 초5일 끝이 났다. 이때 木手 9명이 투입되었으며, 도색은 秦羲遂가 맡았다. 冊謄은 5월 17일에 시작되어 7월에 마무리 되었다. 7월 17일 還安祭가 거행되었는데, 유생 60여원이 참석하였다. 祭服과 黑彩도 다시 장만하였으며, 黑團領 2건도 함께 갖추었다.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 都廳에서 사용하고 남은 목재가 44주이며, 白米 6石과 白綿紬 51尺 5寸도 남았다. 士林들은 이 물력을 향후 明倫堂·東齋·西齋 중수 때 사용하며, 중간에 虧欠되는 일이 없게 하자고 完議하였다.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 풍기향교 都有司는 徐後行이 맡고 있었다. 새로 옮겨진 대성전 위패의 글씨는 당시 풍기군수였던 金厦樑이 썼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官學이었기에 운영에 있어 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을 수가 있었다.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향교의 장려는 守令 考課에 반영되는 사안이어서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41풍기향교 중수 때 있었던 편오군, 즉 束伍軍의 동원과 관내 각면 일꾼의 동원은 분명 관의 협조 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의 인력 동원은 관학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雜錄

▣▣▣齋會▣▣重修聖廟仍報本官刊報
巡使使具由啓聞
辛巳二月初五日視自京來巡營自學宮來本郡而■■〔醴泉〕儒生陪來
三月初七日燔瓦始役五月二十一日畢役同月三十日令編伍軍運入燔瓦▣▣▣
三釜六千餘丈椽木一百四十二介柱棟樑幷大木五十餘株正月內各
面軍移轉
燔瓦匠僧六名都色姜以亨庫直介金伊責卜
四月二十六日移
安其日仍破屋移安時地主及鄕先生及儒生五十餘員▣
五月初六日始役木手九名都色秦羲遂六月初五日畢役
同月初六日蓋瓦畢役仍始仰沙壁十三日間
同月十七日冊謄始役七月初▣▣畢役▣▣▣
七月十七日還安時儒生六十餘員
祭服黑彩七件同時改備黑團領二件亦同時備上
其時都廳用下餘木四十四白米六石
白綿紬五十一尺五寸
後日明倫堂東西齋重修時所用次拿漢次知勿爲虧欠事士
林完議都有司徐後行
改題

大聖位殿郡守金厦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