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41년 聖廟 重修 일지
雜錄
자료의 내용
1641년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진행된 聖廟, 즉 大成殿 重修 과정을 간략히 기록해 놓은 일지다. 이 자료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일지에서 확인되는 1641년 풍기향교 대성전 중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성전 중수는 풍기군이 慶尙監營에 보고하고, 이어 慶尙道觀察使가 조정에 啓聞을 올리는 일련의 절차를 거친 후 진행되었다. 먼저 1641년 2월 초5일 경상감영 측이 풍기향교를 방문하였는데, 인근 醴泉郡의 醴泉鄕校 유생들도 倍來하였다. 중수에 앞서 경상감영이 풍기향교 대성전의 상태를 점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 제작은 3월 초7일 시작해 5월 21일 마무리되었다. 3월 30일 編伍軍에게 영을 내려 기와를 옮기게 했다. 세 개의 큰 가마, 椽木 142개, 棟梁으로 쓰일 大木 50여 주는 관내 各面에 분담시켜 옮겨오게 했다. 이때 燔瓦匠은 승려 6명이 담당 하였으며, 都色은 姜以亨, 庫直은 介金伊가 맡았다. 4월 26일 대성전을 허물고 위패를 移安하였다. 이안 때 地主, 즉 豊基郡守와 鄕先生 및 유생 50여원이 참석했다. 5월 초6일 시작된 공사는 6월 초5일 끝이 났다. 이때 木手 9명이 투입되었으며, 도색은 秦羲遂가 맡았다. 冊謄은 5월 17일에 시작되어 7월에 마무리 되었다. 7월 17일 還安祭가 거행되었는데, 유생 60여원이 참석하였다. 祭服과 黑彩도 다시 장만하였으며, 黑團領 2건도 함께 갖추었다.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 都廳에서 사용하고 남은 목재가 44주이며, 白米 6石과 白綿紬 51尺 5寸도 남았다. 士林들은 이 물력을 향후 明倫堂·東齋·西齋 중수 때 사용하며, 중간에 虧欠되는 일이 없게 하자고 完議하였다.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 풍기향교 都有司는 徐後行이 맡고 있었다. 새로 옮겨진 대성전 위패의 글씨는 당시 풍기군수였던 金厦樑이 썼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官學이었기에 운영에 있어 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을 수가 있었다.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향교의 장려는 守令 考課에 반영되는 사안이어서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41년 풍기향교 중수 때 있었던 편오군, 즉 束伍軍의 동원과 관내 각면 일꾼의 동원은 분명 관의 협조 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의 인력 동원은 관학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