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년 3월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의 儒生 南鵔慶 등이 一難을 軍籍에서 減除해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 慶尙左兵使에게 올린 上書
자료의 내용
1655년 3월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 儒生 南?慶 등이 兵使에게 올린 上書다. 풍기군이 安東鎭管에 소속된 관계로 여기서 병사는 慶尙左兵營 左兵使로 보인다. 이 상서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 유생 남준경 등은 상서를 통해 경상좌병사에게 一難을 軍籍에서 減除해 달라고 청원해 놓았다. 이 청원은 풍기향교 校奴 後種 사건의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후종 사건은 수 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본 「잡록」의 다른 기사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상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남준경 등은 우리 풍기군이 영남 벽지에 위치해 있어, 자신들은 兵政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였다. 후종과 일난 모두 풍기향교의 노비였지만, 자신들을 속이고 良人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뒤, 양인 軍役에 편입했기에 자신들이 병정을 잘 몰라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우선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풍기향교의 재정 사정이 도내에서도 특히 열악하다고 주장하였다.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인 노비가 적어, 使喚을 할 자들이 부족해 향교 유지가 매우 어려운 사정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풍기향교에 소속되었던 교노 후종은 향교를 모반할 마음을 품고, 조카 일난과 함께 모의하여 軍簿에 이름을 올렸다.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던 것이다. 본 「잡록」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일난의 어머니는 후종의 여동생으로 노비 신분이었지만, 아버지가 풍기군의 書員으로 호적 작성에 간여하는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군적 入屬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지난 1648년에는 후종이 京砲手, 즉 訓鍊都監 포수로 입속해 버렸다. 훈련도감은 중앙군영 중 하나이며, 그 군졸은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따라서 후종은 上京入番하였고, 漢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풍기향교 교노에서 비교적 안정된 양인들이 입속하는 훈련도감 포수로 신분상승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풍기군의 士林들은 풍기군과 慶尙監營, 훈련도감과 兵曹 등에 呈文하여, 후종에 대한 처벌과 교노로의 환속을 지속적으로 청원하게 된다. 이에 훈련도감은 경상감영이 粘移해 온 문서를 바탕으로 漢城府의 帳籍을 조사하였고, 후종이 교노였던 사실을 적발해 내었다. 그 결과 훈련도감은 후종을 풍기향교 교노로 환속시키고, 포수 자리를 풍기군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으로 代定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후종은 이 처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族類와 모의하여 경상감영에 議送을 올린 것이다. 풍기향교 校生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되었다고 호소하면서 소송을 일으켰는데, 경상감영은 풍기향교 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후종에게는 刑訊을 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후종 문제가 일단락되자, 풍기향교 유생들은 후종의 족류이자, 동조자인 일난을 고발하였다. 일난은 후종의 여동생이었던 婢 種伊介의 소생인데, 군역에 입속되어 있었다. 애초 지역 사림들이 일난을 적발하지 못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난도 적발하여 군적에서 減除해야 하며, 그를 풍기향교 노비로 입속시켜 향교를 扶護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상서에 대해 경상좌병사는 병조에 해당 사실을 보고할 것이고, 병조 啓聞을 통해 허락을 받으면 일난을 군적에서 ?下하고 다른 사람을 그 역에 충당할 것이라는 題辭를 3월 30일자로 내리게 된다.
상서 다음에는 제사를 받은 후 진행되었던 후속 조치를 간략히 정리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병조에서 代定을 허락하는 지시가 내려왔고, 풍기향교 유생들이 풍기군에 이것의 조속한 시행을 청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兵房으로 하여금 그 공문을 歲抄케 하였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향교 노비의 존재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노비는 전답과 더불어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향교에 소속된 노비들은 해당 향교에 물력 또는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본 상서에 등장하는 후종도 풍기향교에 사환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향교 노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도망노비의 증가와 상대적인 노비 가치의 하락, 노비의 신분 상승 욕구 증폭, 정부의 軍額 확충 정책 등에 따라 노비의 양인화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후종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양인이 되었으며, 나아가 훈련도감 포수로 입속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향교의 경제적 기반 위축을 우려한 풍기군의 사림과 풍기향교 측은 후종을 노비로 환속시키기 위해, 관에 청원하였고 소송 끝에 승소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후종뿐만 아니라, 조카 일난도 환속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다른 기사를 살펴보면 후종의 어머니 역시 풍기향교 노비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一賤則賤과 奴婢從母法에 따라, 후종과 그의 형제, 그리고 자식들은 후종의 어머니가 향교 노비인 관계로 원칙상 전원 풍기향교 소유의 노비였다. 그러나 일난은 양인 신분으로 군역을 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후종의 여동생으로 노비이지만, 노비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노비종모법을 적용하지 않고 양인으로 신분을 속인 채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풍기군의 사림들은 후종의 문제가 일단락 된 후, 일난까지 향교 노비로 환속시키려 조직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