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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9년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49.4721-20170630.Y172190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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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49
형태사항 크기: 32 X 26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49년 기사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소재 풍기향교(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잡록(雜錄)」에 수록된 1649년 기사다. 당시 풍기향교의 수임(首任)인 도유사(都有司)는 남준경(南?慶)으로 나타난다. 1649년의 기사는 크게 네 가지다. 첫 번째는 인조(仁祖)의 승하(昇遐)로 인해 풍기군에서 치러진 국상(國喪)과 관련된 것이다. 5월 16일 발상(發喪)부터 10월 초3일 졸곡(卒哭) 때까지의 일지를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 기간 중에 향교 석전제(釋奠祭)가 거행 될 예정이었지만, 국상으로 중지되었다. 두 번째는 향교 중수와 관련된 기사다. 이 해에 풍기향교의 제기고(祭器庫)와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수하였는데, 관에서 물력을 부조(扶助)·지원해 주었고, 인력까지 동원해 주었음이 나타난다. 세 번째는 경상감영(慶尙監營)에서 새로 간행된 서책을 보내주었다는 기사고, 네 번째는 향교 노비와 관련된 문서를 찾았다는 기사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49년의 國喪, 향교 重修, 서책 수령, 문서 推納 기사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49년 기사다. 당시 풍기향교 都有司는 南?慶으로 나타난다. 남준경풍기향교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기록해 놓은 「잡록」을 처음 엮은 인물로 1641~1681년 「잡록」은 현재 전하는 4책의 풍기향교 「잡록」 중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이다. 이 「잡록」에는 「잡록」 작성의 경위를 밝혀 놓은 識가 수록되어 있는데, 남준경이 썼다. 1649년 기사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이며, 대략 다음과 같다.
仁祖가 昇遐하였다. 이로 인해 5월 13일 豊基郡守는 客舍로 가서 公事를 정지하고 印信을 封하였다. 고을의 三所, 즉 書院·鄕校·鄕廳의 所任과 몇몇 사람들이 함께 官門 근처에 모여 上使의 지시를 기다렸다. 16일 밤에 關文이 와서 동이 틀 무렵 殿牌廳에 모여 곡을 하였다. 發喪과 4배를 거행하였으며, 군수와 執事·會員이 모두 黑冠과 白帶를 착용하였다. 6월 21일 고을 3소의 소임과 몇몇 사람이 관문에서 곡하였고 成服했다. 군수와 향선생은 모두 紗帽·布團領·麻繩帶를 착용하였다. 회원 70여인이 이때 모였는데, 오지 못한 자는 里中에 모여 곡하였다고 한다. 國喪의 卒哭 전에는 上祀에 해당되는 宗廟社稷祭만 거행하고, 釋奠祭·?祭 등의 中祀 이하는 폐하라는 지시가 關文을 통해 내려졌다. 그런 까닭에 8월 향교에서 거행할 예정이었던 석전제가 거행되지 않았고, 9월 예정이었던 서원의 享祀도 폐해졌다. 9월 11일 국상의 발인이 거행되었다. 關文에 따라 大小臣民이 官門에 모여 곡하였다. 20일 下玄宮을 거행할 때도 똑같았다. 10월 초3일 졸곡 때에는 會哭하라는 上使의 지시가 없었다.
향교 祭器庫와 東齋·西齋를 중수하려고 했으나 國葬 전이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 군수가 사유를 갖추어 慶尙道觀察使에게 論報하니,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에 중수를 진행한다는 牌旨를 경내에 내렸다. 7월 25일 材木을 捧上하였고, 27일 공사를 시작하였다. 군수가 친히 와서 공사를 살폈고, 고을의 儒品에서 奴僕에 이르기까지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煙戶軍과 道路干軍도 동원되었다. 8월 초4일 동재를 허물고, 6일에 기둥을 세웠다. 19일에는 서재를 허문 후 수일 뒤에 기둥을 세웠다. 10월 22일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都監 1원, 都色 1인, 役軍 700여명, 木手 8인이 임명 또는 동원되었고, 도유사는 都檢하였다. 家舍의 間架와 제기고 2칸, 동재·서재의 退柱와 18칸, 酒房 1칸, 斗支廳 1칸, 대문 1칸을 수리하여 고쳤으며, 또한 대문 東邊에 小夾門을 새로 지었다. 관에서 下帖를 내려 成造 할 때 쓸 제물을 내려주었다. 磊? 1?는 明倫堂에 단청을 할 때 쓰였다. 이에 앞서 향교 유생들이 관에 청원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이를 구해 주라는 관문을 長?縣에 내렸다. 또한 이것이 풍기향교까지 잘 운송될 수 있도록, 沿路의 고을이 협조하라고 지시하였다. 2월 초 향교의 下人이 가서 督領하고 왔으며, 경상도관찰사 李曼은 別會租 5석을 부조하라는 하체를 내렸다.
11월 초9일 慶尙監營에서 새로 간행한 『史略』 2권 2건을 보내왔다. 또 경상감영에서 새로 간행한 『小學』 4권 1건과 眞墨 40丁, 松烟 10정을 보내왔다.
故 奴 五十同의 立案과 所志가 秦孫가에 소장되어 있어, 비로소 推納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의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1649년 기사 중 주목되는 것은 국상과 향교 중수다. 국상 중에는 국가 의례 가운데 중사를 중지시켰는데, 향교에서 거행하는 석전제도 중사에 해당되었다. 향교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이 물력을 지원해 주고, 인력 동원을 지시했음이 확인된다. 향교가 지방의 官學이고, 향교의 장려는 守令考課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중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의 부조는 향교 운영에 있어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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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己丑五月初八日都有司南?慶
仁祖大王昇遐十三日因道路人間之郡守卽避衙內出客舍大門廊?
間停公事封印信鄕中三所所任人及某某人皆會官門近處待上
使文字十六日夜關字來到昧爽會哭於殿牌廳庭內及大門外
發喪行四拜郡守及執事及會員皆黑冠白帶越六月二十一
日鄕中三所任及某某人皆會官門哭臨成服郡守及鄕先生皆衣
紗帽布團領麻繩帶會員凡七十餘未來者各於里中會哭成服
有關字國喪卒哭前只行上祀【謂宗廟社稷祭也】廢中社以下【中祀謂釋奠?祭等祭也】
故八月釋奠未擧行書院亦廢九月享祭
九月十一日國喪發引有關字令大小臣民會官門哭二十日下
玄宮時又如之十月初三日卒哭時則無上使會哭文字
鄕校祭器庫及東西齋將欲重修而國葬前擧役何如事
郡守具由報使則方伯回送內使之重修卽發官牌旨子境內
七月二十五日材木捧上二十七日始役郡守親來看役先後鄕中儒
品奴次役官命煙戶軍及道路干軍又不足又借於儒品
八月初四日破東齋初六日立柱十九日破西齋後數日立柱十月
二十二日罷役
凡都監一員都色一人役軍七百餘名木手八人都有司都檢果
凡所修改家舍間架祭器庫二間東西齋前後退株幷十八間
酒房一間斗支廳一間大門一間又創開小夾門於大門東邊粟
三升麴二同官帖字成造時用下

磊?一?明倫堂丹?次方伯因儒生等呈文移關于
?縣
令沿路官轉運納于本校二月初間本校下人往督領來【一?改量用十二斗】
別會租伍石丹?時扶助帖字監司李曼
新刊史略初二卷自巡營送來二件也李曼
己丑十一月初九日來
新刊小學四卷一件自巡營送來眞墨四十丁松烟四十丁亦來
故奴五十同立案所志一度秦孫家所藏而今始推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