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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59년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59.4721-20170630.Y172190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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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59
형태사항 크기: 32 X 26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41~1681년 「잡록(雜錄)」 수록 1659년 기사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잡록(雜錄)」에 수록된 1659년 기사다. 이 해의 기사에는 향교 교위전(校位田)을 환전(換田)한 사실, 효종(孝宗) 승하(昇遐)로 인해 풍기군에서 거행된 국상(國喪)의 진행 과정, 풍기군수(豊基郡守) 신홍망(申弘望)풍기향교에 물품을 부조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해의 기사 중에는 교위전의 환전 사실이 주목된다. 교위전은 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전답으로 향교전(鄕校田)이라고도 불렸다. 향교는 향교전에 수조권을 행사하며, 그 수입을 향교 재정으로 충당하였다. 환전은 기존 전답을 수세(收稅)가 용이하거나 비옥한 다른 전답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전답 수입을 늘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659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에서 있었던 校位田 換田, 國喪, 松墨 부조 관련 기사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59년 기사다. 1659년 기사는 크게 校位田 換田, 國喪, 松墨 부조 관련 기사로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1659년 2월 봄 거행된 享祀를 파재 할 때, 進士 宋大庭이 校位田을 相換하자고 堂中에 건의하였는데, 당중은 송대정의 건의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로 인해 교위전의 換田이 이루어졌다. 成文은 향교 所任이 謙退한 상황에서 송대정이 自筆로 했다. 풍기향교 殿直 末叱이 명을 받아 換田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해당 교위전은 1667년 9월 24일 還退했다고 추가로 부기해 놓았다.
5월 초4일 孝宗이 昇遐하였다. 초9일 丹陽郡의 下人이 關文을 가지고 왔다. 豊基郡守는 즉시 南廳으로 나가 관문을 기다렸다. 10일 저녁 관문이 도착하여 풍기군수榮川郡 사람 金繼▣, 捉督 李馥, 三所의 소임 등이 殿牌廳 庭內와 대문 밖에 香卓을 설치하고 哀禮를 거행하였다. 이때 참여한 사람들은 素服·烏紗帽·黑角帶를 착용하였다. 入庭한 후 使臣은 동쪽에 外官은 서쪽에 서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았고, 執事는 香을 올렸다. 사신 이하는 엎드려 盡哀한 뒤, 四拜禮를 행했다. 6일이 지난 15일 成服하였다. 그날 이른 아침에 正廳에 향탁을 설치한 뒤 성복의 예를 거행하였는데, 1649년의 전례를 따랐다. 1649년은 仁祖가 승하한 해이다. 이때 모인 三所, 즉 향교·書院·留鄕所의 회원은 40여인이었다.
6월 풍기군 관아에서 松墨 中節 5丁과 小節 5丁을 풍기향교에 보냈다. 같은 달 14일에는 常米 1석과 眞水荏 3두를 보내왔다. 당시 풍기군수申弘望이었다.
10월 28일 國葬의 發引을 거행한다는 관문이 내려왔다. 풍기군의 大小臣民이 官門에 모여 哭을 했다. 29일 下玄宮 때도 똑같은 형태로 진행되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의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1659년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2월에 있었던 교위전, 즉 鄕校田의 換田이다. 향교는 官學이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향교전을 지급받았다. 고을의 읍격에 따라 지급되는 향교전의 규모는 차이가 있었는데, 풍기향교는 고을의 읍격이 郡인 관계로 5結의 향교전을 지급받았다. 향교는 향교전에 대한 수조권을 행사하며, 이를 향교의 재정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들은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규정보다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답 수입을 늘려갔는데, 그 중 하나가 換田이었다. 기존의 전답을 收稅가 용이하거나 수확량이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수입을 늘리는 방법이었지만, 반대로 향교 관련자의 사욕이 개입하여 향교 전답이 방만하게 운영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해당 기사 말미에는 이때 換田한 전답을 1667년 도로 물렸다는 내용이 추가로 부기되어 있어, 향교전 換田 때 향교 운영자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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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己亥二月春大祭破齋時宋進士大庭以校位田相換
事呈榮利卽通于堂中到堂中皆以快許因行成文
之際所任則謙退不敢故宋進士自筆成文極春於

殿直末叱主處事只受下人文券
宋進士換田文記一度【丁未九月二十四日還退持▣】
己亥五月初四日
孝宗大王昇遐初九日場市因丹陽官下人關之郡守卽出待于南廳▣
九二
十日晩頭關字來到郡守榮川金繼▣捉督李馥及三所任人
行擧哀禮於殿牌廳庭內及大門外設香卓以素服烏紗帽黑角
帶入庭使臣在東外官在西北向?執事上香使臣以下伏盡哀行四
拜越六日十五日成服其日早晨設香卓於正廳成服之禮一依己丑年例
三所會員四十餘
六月日
松墨中節五丁小節五丁官所送郡守申弘望
同月十四日
常米壹石眞水荏各三斗官帖字郡守申弘望
十月二十八日國葬發引有關字令大小臣民會哭官門
二十九日下
玄宮時又如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