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9년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에서 있었던 校位田 換田, 國喪, 松墨 부조 관련 기사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41~1681년 「雜錄」에 수록된 1659년 기사다. 1659년 기사는 크게 校位田 換田, 國喪, 松墨 부조 관련 기사로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1659년 2월 봄 거행된 享祀를 파재 할 때, 進士 宋大庭이 校位田을 相換하자고 堂中에 건의하였는데, 당중은 송대정의 건의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로 인해 교위전의 換田이 이루어졌다. 成文은 향교 所任이 謙退한 상황에서 송대정이 自筆로 했다. 풍기향교 殿直 末叱이 명을 받아 換田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해당 교위전은 1667년 9월 24일 還退했다고 추가로 부기해 놓았다.
5월 초4일 孝宗이 昇遐하였다. 초9일 丹陽郡의 下人이 關文을 가지고 왔다. 豊基郡守는 즉시 南廳으로 나가 관문을 기다렸다. 10일 저녁 관문이 도착하여 풍기군수와 榮川郡 사람 金繼▣, 捉督 李馥, 三所의 소임 등이 殿牌廳 庭內와 대문 밖에 香卓을 설치하고 哀禮를 거행하였다. 이때 참여한 사람들은 素服·烏紗帽·黑角帶를 착용하였다. 入庭한 후 使臣은 동쪽에 外官은 서쪽에 서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았고, 執事는 香을 올렸다. 사신 이하는 엎드려 盡哀한 뒤, 四拜禮를 행했다. 6일이 지난 15일 成服하였다. 그날 이른 아침에 正廳에 향탁을 설치한 뒤 성복의 예를 거행하였는데, 1649년의 전례를 따랐다. 1649년은 仁祖가 승하한 해이다. 이때 모인 三所, 즉 향교·書院·留鄕所의 회원은 40여인이었다.
6월 풍기군 관아에서 松墨 中節 5丁과 小節 5丁을 풍기향교에 보냈다. 같은 달 14일에는 常米 1석과 眞水荏 3두를 보내왔다. 당시 풍기군수는 申弘望이었다.
10월 28일 國葬의 發引을 거행한다는 관문이 내려왔다. 풍기군의 大小臣民이 官門에 모여 哭을 했다. 29일 下玄宮 때도 똑같은 형태로 진행되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의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1659년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2월에 있었던 교위전, 즉 鄕校田의 換田이다. 향교는 官學이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향교전을 지급받았다. 고을의 읍격에 따라 지급되는 향교전의 규모는 차이가 있었는데, 풍기향교는 고을의 읍격이 郡인 관계로 5結의 향교전을 지급받았다. 향교는 향교전에 대한 수조권을 행사하며, 이를 향교의 재정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들은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규정보다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답 수입을 늘려갔는데, 그 중 하나가 換田이었다. 기존의 전답을 收稅가 용이하거나 수확량이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수입을 늘리는 방법이었지만, 반대로 향교 관련자의 사욕이 개입하여 향교 전답이 방만하게 운영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해당 기사 말미에는 이때 換田한 전답을 1667년 도로 물렸다는 내용이 추가로 부기되어 있어, 향교전 換田 때 향교 운영자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