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년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의 社稷祭 進參, 雙岳寺 승려 처벌, 풍기군 관아의 부조, 건물 수리, 식목 관련 기사
鄕校雜錄 第二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92~1720년 「鄕校雜錄」 第二에 수록된 1715년 기사로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1715년 2월 초1일 社稷祭 獻官 黃壽?이 身病 때문에 오지 않았다. 鄕所의 三任, 즉 座首 1인과 別監 2인도 모두 큰 일이 있는 까닭에 밤이 깊어진 후에야 禮房의 告目이 來到하였다. 이에 豊基郡守는 進參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부를 내렸다. 형세가 부득이해진 관계로 모든 有司와 齋任이 진참하였다.
2월 초10일 大祭 때 明倫堂 東齋와 西齋에 사용할 도배지 마련을 위해, 예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각 사찰로부터 白紙 1권씩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사찰 중 雙岳寺 승려가 誣訴하여 예전 규칙을 없애려고 한 까닭에, 풍기향교가 이 사실을 풍기군에 論報하였다. 이에 풍기군수는 題辭를 내려, 그 승려의 볼기를 치고 좋은 백지 2권을 납부케 했다.
4월에 松烟 大節 1丁과 小節 4정을 풍기군 관아에서 보내왔다. 당시 풍기군수는 金遇華였다.
7월 초1일 大成殿·奠祀廳·食樓·齋房에 비가 새고, 담장이 훼손된 까닭에 관아에 청원하여 夫瓦와 女瓦를 지원 받아 보수하였다. 당시 풍기군수는 김우화였으며, 풍기향교 都有司는 黃雲亨, 掌議는 安邦?, 齋任은 李成鐸과 黃{甫/衣}가 맡고 있었다.
10월 초1일 향교 동쪽과 서쪽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11월, 관아에서 松墨 대절 1정과 中節 5정, 新曆 1건을 보내왔다. 당시 풍기군수는 김우화, 풍기향교 도유사는 황운형, 장의는 안방엽, 재임은 황보와 秦聖和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인데, 1715년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屬寺의 존재와 풍기군 관아의 부조다. 속사는 향교와 같은 각종 기관에 소속되어 물력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찰을 뜻한다. 조선시대 풍기향교는 쌍악사 등의 사찰을 속사로 점유하며, 이를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풍기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官學이었던 관계로 그 운영에 있어,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았다. 특히 향교의 장려는 守令考課 가운데 ‘興學校’에 해당되었기에, 지방관 입장에서 향교 지원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에 본 자료에서처럼 풍기군수는 수시로 풍기향교에 물품을 부조해주었고, 공사 때 각종 물력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