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년 3월 30일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의 儒生들이 額內 校生에 대한 考講이 부당하다며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上書
鄕校雜錄 第二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92~1720년 「鄕校雜錄」 第二에 수록된 1702년 上書다. 이 상서는 1702년 3월 30일 풍기향교 儒生 南昌夏 등이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것으로 향교 額內 校生에 대한 考講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상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서에서는 먼저 汰講하는 것은 학문을 권장하는 조정의 뜻에서 나왔고, 落講한 자를 軍役에 충당하는 것 또한 조정의 법도라고 했다. 조선시대 향교 投屬을 통해 많은 양인들이 避役을 도모했던 관계로 조정에서는 軍額 확충을 위해 향교 교생에 대한 태강, 즉 考講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7道의 경우 庶派와 中人 등이 校案에 입속되어 있어 應講의 대상자로 삼고 있으나, 유독 우리 嶺南은 사대부의 자제들만 圈點하여 액내 교생으로 입학시킨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액내 교생을 額外 교생과 함께 應講케 하니, 만약 사대부의 자제가 혹 군역에 충당된다면 매우 그릇된 일임을 전제하면서, 지난 봄 풍기군과 榮川郡 두 고을은 액내 교생과 액외 교생이 함께 응강을 해서 원망을 품은 자가 발생하였음을 호소해 놓았다. 이에 경상도관찰사가 영천군에 도달할 무렵, 먼저 영천군의 사림들이 呈文하여 특별히 이를 시정 받았고, 이후 풍기향교의 유생들도 같은 사유로 상서를 올렸던 것이다. 상서에서 풍기향교 유생들은 향후 慶尙道都事가 巡講하러 올 것인데, 액외 교생을 응강할 때, 액내의 사대부를 混錄시키지 않도록 조치해 줄 것을 청원해 놓았다. 본 상서에 대해 경상도관찰사는 액내 교생과 액외 교생의 구분이 엄중하기 때문에, 다른 고을의 전례에 따라 액내 교생은 試講하지 말라는 題辭를 내리게 된다. 당시 풍기향교 都有司는 蔡應海, 齋任은 남창하와 河聖圖가 맡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교생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래 향교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교생의 정원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각 향교들은 정원 외의 교생을 입학시켰다. 이러한 교생 중에는 사족의 자제가 아닌 庶孼·中人·常民 등 비사족 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향교 입학을 통해 사족으로의 신분 상승과 軍役 등 각종 雜役을 피역하려는 사회·경제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향교 입장에서 정원 외 교생의 입학은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열악한 향교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입학 조건으로 이들로부터 布物·穀物 등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지방관은 이러한 관행을 興學이라는 명분으로 묵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향교 교생의 증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초래하였다. 먼저 군액이 감소하고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군역에 종사하거나 군포를 납부해야 되는 이들이 향교에 투속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향교 입학이 피역의 수단이 되자, 조정은 고강·태강을 통해 학문이 아니라 피역에 뜻을 품고 입학한 자를 추려내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강·태강은 본 상서에서 확인되듯이 전통적인 사족층의 반발을 가져왔다. 피역과 무관한 전통적인 사족의 자제들이 행여 낙강하여 군역에 충당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향교 구성원 간의 구별이었다. 전통적인 사족층은 피역을 위해 입학한 교생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1702년 풍기향교처럼 액내와 액외를 구분하였다. 그 외에도 東齋와 西齋의 구분, 儒生과 교생의 구분, 靑衿錄 작성 등도 같은 의도에서 이루어 진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재지사족 간, 또는 신흥 사족의 도전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후기 재지사족의 신분 유지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