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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92~1720년 「향교잡록(鄕校雜錄)」 제2(第二) 수록 1692년 풍기향교 이건(移建)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92.4721-20170630.Y1721907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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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92
형태사항 크기: 24 X 22.5
수량: 4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1692~1720년 「향교잡록(鄕校雜錄)」 제2(第二) 수록 1692년 풍기향교 이건(移建) 기사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소재 풍기향교(豊基鄕校)에서 엮은 1692~1720년 「향교잡록(鄕校雜錄)」 제2(第二)에 수록된 기사다. 이 기사는 본 「향교잡록 제2」 가장 서두에 수록되어 있으며, 1692년 진행된 풍기향교 이건(移建) 경위와 과정을 기록해 놓았다. 기사에 따르면 풍기향교1542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주도하여 정림사(井林寺) 터로 이건하였는데, 17세기 동안 풍기군의 사림(士林)들이 옛 터로의 향교 이건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50여 년 동안 풍기군수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향교 이건을 청원하였고, 1692년이 되어서야 향교 이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본 기사에는 당시 공사의 진행 과정과 위판(位版)의 이안(移安)·환안(還安) 절차, 투입된 인력과 소요된 곡물 등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본 기사에는 풍기군수 정증(鄭?)이 이건 사업을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이 나타나, 향교 운영과 관의 지원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692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를 移建하게 된 경위와 공사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
鄕校雜錄 第二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92~1720년 「鄕校雜錄」 第二에 수록된 1692풍기향교 移建 관련 기사다. 1692~1720년 「향교잡록」 제2는 풍기향교에서 엮은 「잡록」 4책 중 2권에 해당되는데, 1692풍기향교 이건 기사는 본 「향교잡록」 제2의 가장 서두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풍기향교 이건 경위와 과정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으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우리 풍기향교가 현재 위치에 건립된 것은 오래되었으나, 그와 관련된 記傳이 없어 어느 연대에 처음 건립되었고,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지난 1542豊基郡守 周世鵬에 의해 향교 이건이 이루어졌다. 1542년 풍기향교 大成殿을 拜謁한 주세붕은 廟宇가 퇴락한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이건할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이에 고을 사람 生員 黃彬과 논의하여 고을에 소재한 井林寺 터로 향교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주세붕이 쓴 記文이 전해져, 興學과 尊聖을 위해 이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향교가 이건 된 지 150년이 지났는데, 고을의 父老들이 다시 향교 이건을 도모하게 되었다. 향교 이건은 지난 50년 간 고을 父老들이 풍기군수慶尙道觀察使에게 여러 차례 청원했던 사안으로 이들은 주세붕 이전 향교가 위치했던 옛 터로 향교를 도로 이건하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691년 9월 士友 黃處厚 주도로 이건을 청원하였는데, 이때는 禮曹에 일이 많아 처리되지 못하고, 이듬해인 1692년 이건을 행하라는 關文을 발급 받게 되었다. 당시 풍기군수兪命雄으로 移安의 절차와 공사를 하는 방법 등의 일을 榮川郡守 朴世樑에게 문의하였다. 이듬해 위패를 이안하고, 공사 터를 닦았으며, 3월 초 拓土를 시작하였는데, 성묘의 礎石은 예전 것을 사용하였다. 12일에는 새로운 풍기군수 鄭?이 방문하여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다. 고을 사람 黃龍漢이 一鄕의 천거로 공사의 都監을 맡았지만, 老病을 이유로 그만 두었다. 이에 풍기군수 정증이 적극적으로 공사를 독려하였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都監 4인, 官色 2인, 鄕校書記 1인, 庫子 2인, 差使 4인, 食母 6인, 木手 12인 등이 투입되었다. 목수 중 上木手는 榮川郡에서 온 權順一이 맡았다. 이 외에도 石工 2인, 鐵匠 1인, 蓋匠 2인, 瓦所都監官 2인, 官色 1인, 瓦匠 6인 등이 투입되었으며, 役糧은 宣惠廳에서 온 20석 등을 포함해 正租 150여석을 집행하였다. 4월 초, 먼저 東齋와 西齋의 室을 이건하였다. 이달 10일 漢陽에서 巡營으로 香祝을 보냈으며, 순영은 다시 本郡에 香祝을 보내왔다. 19일 본군 儒生 90여 명이 향교에 도착하였다. 20일에 告由하고 客舍에다 位版을 이안하였다. 그 다음날 聖廟를 허물고 兩?의 목재를 옮겼다. 5월 초1일 上樑文을 지었다. 6월에 明倫堂을 허물고 목재와 기와를 옮겨왔으며, 이후 1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丹靑은 丹陽郡에서 온 승려 成順이 맡았다. 還安은 7월 그믐날에 거행하는 것으로 정한 뒤, 慶尙監營에 보고하였고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들에게 통지하였다. 환안이 거행 될 때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내도하였고, 본군 유생 200여 명도 모였다. 8월 초2일 향축이 내도하였고, 8월 3일 丁亥日에 釋菜禮를 성대히 거행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官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지방관의 지원과 협조 하에 운영되었다. 특히 향교의 장려는 守令考課 중 ‘興學校’에 해당되었기에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향교 운영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따라서 향교 측은 운영에 있어 지방관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풍기향교 이건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된다. 16세기에 있었던 풍기향교 이건도 지방관인 풍기군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1692년의 이건도 지방관의 지원과 협조 하에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지방관과 중앙 관청으로부터 물적·인적 자원을 지원 받은 것이 주목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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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鄕校雜錄第二

昔吾鄕學校始建于此而古無記傳又無甲乙年代
久近不來考也歲在嘉靖壬寅周先生愼齋?出宰
是邑謁于聖廟見廟宇朽頹大懼儒效?闕慨然
有移建之意與郡居黃上舍彬共議改卜于井林之基而
紀移而記文曰棟折支撑朽壓王位又曰敎無堂▣無舍
其移之也非爲所家諾也意有以也?念間之▣▣三之
有天下國家也創業之君經綸草?而不遑於興學
守文之主遵守舊章而又無事柄振作這校之法只在
聖廟敎養之方未盡視模逮我朝中葉宏視懿範於
樂文物於斯爲盛東方八路之邑尊聖衛道今同廣學
右文之化一時大振愼齋所以舍此移彼一新其敎者▣▣
矣校在井林者一百五十年于前而五十年之間一鄕父老▣
諸生咸願重建舊基或呈于地主或呈于式稱尊親▣
之得有者也辛未秋九月士友黃處厚木乎▣▣爲▣▣
爾陳施九闕恩綸一下間語所謂▣▣▣▣▣
是也伊時禮曹多事未卽行關明年▣▣▣▣
移建關文始到主?兪公?意外?▣故移安▣▣

請事及始役等事?處于榮川兼?朴熙亮?世樑?同月二十二日▣▣
開基三月初乃擧拓土之役則聖廟礎石依舊斑墨如報
無乃天工令思守護爲今日不撓於坐向者與是自十二日聘
城主鄭公?下車之後以經先始役之故而有督忙之事故
當任者夏之延以伸謝得以稍解然以此之故三四日止役十三日
乃復興役而事有至難不得任使者多矣工目都監黃龍漢
當初一鄕之所薦出宜其有不日之功而官責一向獨偏至於遞
改■■■■■■■■如我老病之人我代於恐懼之日惟
欲圖急畏於盛會不得已進見地主於官門仍悔同任
於役所是乃三月三十日也周覽百役具擧始認前任之猶
過來矣是役也都監四員官色二鄕校書記一庫子二差使
四食母六菜?六木手十二上木手榮川權順一也石工二鐵匠
一蓋匠二瓦所都監官二員官色一瓦匠六▣子二役粮三則
宣惠廳到給二十石精得五十二石正租一百五十餘石也工匠
木各勤其事四月初先移東西齋室次移公須十八間是
月初十日移安香祝自京皆至巡營巡營至本郡奉
安于殿大廳前蔽?帳十九日本郡儒生九十餘員
矣于鄕校二十日己亥行告由祀移安位版于客舍東
上房翌日仍毁聖廟及兩?輸材運瓦五月初一日庚戌
上殿樑獻官輩酒▣上樑文行籍之官所製也六月初
毁明倫堂運材瓦逐日就役數月之內役皆垂畢丹靑衣丹陽
成順也還安一款預以七月晦日卜定啓達事轉報于
故來校通告於道內則到邑多士及本郡儒生二百
餘員聚會等待者前期而香祝過限不歲以致多士之

罷▣來際歎哉八月初二日香祝來到復卜以八月乙酉▣▣
越三日丁亥釋菜吾鄕盛擧可謂干哉一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