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2년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를 移建할 때 소요된 인력·물력 및 祝文·道會·校任 등의 기록
鄕校雜錄 第二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소재 豊基鄕校에서 엮은 1692~1720년 「鄕校雜錄」 第二에 수록된 1692년 풍기향교 移建 때의 각종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이건 때 소요된 인력과 물력, 告由를 위해 작성된 각종 祝文, 道會 때의 부조, 이건을 맡았던 校任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건 공사 때 役軍 8,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役糧을 마련 할 때 校生이었던 秦夏陪·李延禧·賓德遠, 향교 奴婢였던 奴俊尙·婢是女·奴應申이 물력을 납부하였다. 기와 11,000여 丁을 새로 만들었다. 인근 고을의 향교와 書院에서도 물력을 부조해 주었다. 榮川鄕校에서 木 2疋, 伊山書院에서 木 1疋, 順興都護府 지역 향교와 서원에서 木 2疋을 보내왔다. 丹靑에 사용할 磊綠은 慶尙道觀察使에게 論報하여 지원을 요청하였고, 경상도관찰사는 長?縣에서 이를 지원 받으라고 題給해 주었다. 그러나 물력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長?縣監은 磊綠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還安道會 때 成均館과 도내에 通文을 발송하였다. 그 결과 순흥도호부에서 磊綠 10두를 빌려 올 수 있었다. 세주에 따르면 5두는 단청 때 사용했고, 나머지 5두는 순흥도호부로 還納했다고 한다.
이어 이건 공사 과정에서 작성된 여러 편의 祝文을 수록해 놓았다. 가장 먼저 수록한 축문은 ‘開基祝’으로 왕명에 의거해 옛 향교 터로 이건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聖廟立柱時告由’는 기둥을 세울 때 成造之神에게 이건 경위를 고유한 것이다. ‘移安時告由祝’은 4월 20일 豊基郡守 鄭?이 향교 位版을 이안 할 때 작성하였다. ‘還安告由祝’은 미처 옮겨 쓰지 못했다고 한다. ‘還安祝’은 8월 초8일 환안을 거행하기 위해 작성하였다.
7월 28일 열린 도회 때 白紙 2卷, 壯紙 10丈, 松墨 6丁, 甘醬 1斗, 燒木 5丹을 풍기군 관아에서 보내주었다. 당시 풍기군수는 정증이었다.
이건이 진행되는 동안 풍기향교 校任은 도유사 黃璨, 掌議 南斗元, 齋任 禁銓·金致相이었는데, 4월 이후 도유사 權用銓, 장의 柳宗開, 재임 安夏範·金南彦 체제로 교체되었다. 이건 공사 때 都監은 黃龍漢·黃海翊·李惟達·李慶翊·李說霖이 맡았는데, 황용한은 3월 중에 교체되었다. 官色은 嚴重平·姜得哲·金玉立·黃聖▣, 伐木都監은 南斗本·朴潤雨·朴履章·李承祖, 燔瓦都監은 朴興道와 秦遇奚가 맡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지방 官學이었기에 관의 지원과 협조 하에 운영되었다. 본 기록에서 확인되는 풍기향교 이건 공사 때도 지방관의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경상도관찰사와 풍기군수가 물력을 지원하거나 부조해 주었음이 확인되며, 인력 동원도 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