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湖南儒會所 會中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湖南儒會所 會中에서 丙午(1906)年 5월에 南源 前秘書郞李秉爀 외 34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은 옛날과 지금의 때가 달라 義理가 不明하고, 세상에 옳고 그름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여러 방법으로 기운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타고난 천성이 장차 무너지는 것을 억눌러야 한다고 하였다. 湖南의 유생들은 자신들이 듣기로 慶州의 손씨들이 요사이 일을 벌인 것은 기이하고 기이함이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윗세대의 淵源이라는 것은 그 정한 바가 틀림이 없으며, 한 터럭의 사사로움도 없으며, 晦齋의 학문연원은 當歲에 수수한 바가 없다고 退溪 李滉이 지은 행장에 있다고 하였다. 퇴계가 행장을 지을 당시 晦齋와 景節公 孫仲敦이 舅甥간인지 모르지 않았는데도 就學이라 말한 것은 회재를 키워준 義理에 관한 것이고, 淵源嫡傳은 舅甥간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授學이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고, 義方이라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 분명하여, ‘無所受’ 의 3자를 퇴계가 쓴 것은 그러한 것을 살펴보고 확정하여 쓴 것이라고 했다. 즉, 퇴계가 글을 씀에 허술하거나 사사로이 쓴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통문에서는 이어서 1845년 당시 발생하였던 손이시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를 보면, 지난 乙巳년에 손씨들이 상량문의 글을 들어서 사실로 내세우는 것은 한때의 망상이 극에 이른 것으로써 의리를 바로하려는 士論으로 꾸짖은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 후로 다행히 잠잠해 진 것이 경우 60여 년 전이었는데, 현재의 손씨들이 그 祖父兄들의 오래된 허물을 반복하고자 한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날 문제의 글을 적은 자도 또한 퇴계의 글을 보았을 것이고, 그 일이 과거에 문제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그 일을 거론하는 것은 세대가 옛날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바뀐 세대는 義理가 분명하지 않고, 세상에 옳고 그름이 없으며, 士紀가 붕괴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江上(禮安)에 거하는 퇴계의 후손에게 부탁하여 文字를 杜撰하는 큰 술수를 부리고, 또한 이를 첨부하여 간행하였다고 했다. 나아가 중간된 실기의 詩序跋文이 이처럼 冒刊한 것이므로 책을 파쇄하고, 목판을 훼판하는 것이 하나같이 준엄한 士論이라고 하였다. 손씨들도 마땅히 大山의 상량문을 다시 살펴보아야 함에도 오히려 황당하게도 감히 회재의 문집을 毁破해야 한다는 요상한 소리를 글로 적어서 문서를 만드니 이는 윗대에서는 들어보지도 않은 변괴라고 한탄하였다. 손씨들이 이와 같이 간행하는 것을 모의한 것은 詩序跋文의 허황된 글이 오던 날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을 보내어 是非의 근거를 제공하고, 퇴계의 글을 믿지 않는 저 宣城(禮安)의 3인은 퇴계의 후예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비록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역시 회재와 퇴계 두 선생의 후학이기에, 이 변고를 듣고는 당연히 모두 성토하였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慶州鄕校와 玉山書院, 陶山書院에 두루 通告하여, 嶺南전역에 3인의 詩序跋文이 들어간 『景節公實紀』를 수거하고, 그 杜撰한 새로운 판목(重刊板木)과 함께 영영 破碎하여 斯文의 淵源에 紊亂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손씨들의 悖習에 이르러서도 士論에 의거하여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湖南儒會所에서 보내온 통문은 孫李是非와 관련된 것이다. 이 시비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孫仲敦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이 시비의 개요는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李象靖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 등 3인의 跋文과 詩를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重刊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 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60년 만에 야기된 孫李是非는 鄕內를 벗어나 道內 전체로 확산되는 양상이었는데, 시비가 재발한 그해 말부터 각 처의 호응에 힘입어 이씨측은 이듬해인 丙午(1906)년부터 손씨측을 압박하는 강도를 높여 나갔다. 이를 살펴보면, 1906년 1월 11일에 양동 이씨들은 東江壇所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東江壇所 說壇修契 시에 附載했던 이씨들의 名帖을 삭제하여 돌려달라는 단자를 동강단소에 보내는 한편, 이씨측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 향내 문중에 대해서도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시비가 확대, 격렬해지는 가운데 이만도 등 3인에게서 회재 행장에 퇴계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이씨가 杜撰한 것이라는 설이 나오고, 손씨측에서는 『晦齋集』을 破板해야 한다는 설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유림들은 통문을 통해 이 일에 관계되는 자를 世德祠에 이름을 걸어 施罰하고, 나아가 모두 영구히 儒籍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손씨의 실기를 私刊으로 간주하여 모두 환송하고 나아가 파판하자는 등 압박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처럼 시비가 도내 전역으로 확대되어 더욱 격화되면서 太學과 湖西儒生, 湖南儒會所, 京約所會中, 京南村儒會에서도 慶州鄕校로 통문을 보내 손씨측을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이처럼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및 태학과 전국 유생들의 성토가 이어지자, 당초 손씨측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이 이씨측으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이시비와 관련한 타도 유생 특히, 호남지역 유생들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