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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송학서당(松鶴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905.4713-20120630.Y125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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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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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송학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958-3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58.4 X 3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5청송송학서당에서 경주옥산서원으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발송한 통문
이 통문은 청송 송학서당 당장 조규락 외 29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으로 손씨측이 경절공실기를 두찬한 것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한 가문의 사사로운 정으로 선현들이 공의로서 집필한 것을 후생들이 감히 고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 하면서, 회재와 경절공은 조카와 외삼촌사이로서 회재가 어린 시절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면서 은혜를 입었기에 그 애뜻한 마음은 후인이 감히 마음대로 생각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정이 지은 상량문에 ‘연원도맥’ 4자를 넣는 것은 매우 엄중하고 큰일인 관계로 대산의 본가에서도 당일로 감정하여 내려 보낸 것이었는데, 이는 그 두 분의 사이를 짐작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연원이라는 것은 여러 계통의 큰 근본이며, 도맥은 오직 하나로 이어져온 밀부이기에 사람의 됨됨이가 안 된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고, 또한 가문의 됨됨이가 안 된 가문에는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퇴계가 회재의 행장을 서술하며 위로 수수한 바가 없고, 정조가 제문을 내릴 때에도 스승이 없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은 모두 성현들에게서 나온 공인된 글이기에 후인이 감히 글을 첨삭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같은 곳(양동마을)에 살면서 서로 언행을 조심하지 않고 창으로 찌를 듯이 다투는 형상을 지켜보니, 모두 죽어서야 끝날 것 같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해보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비록 그러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 시비의 중간에 원병으로 들어가 금일에 감히 말참견을 한다면, 그 상량문의 내용은 60년 전에 이미 헤아려서 감정한 것으로써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원컨대 첨존들이 공의로써 이전으로 되돌리도록 조정한다면 흡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되돌린다는 것은 경절공실기의 중간본(원본)의 불필요한 글을 지우고 그것을 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송학서당은 이전까지 도래한 여타 교원들에 비하여 보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씨측에 대하여 직설적인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은 이 서당이 대원군 훼철이전에 퇴계를 주향으로 하고 있었던 서원으로서 퇴계의 글을 무시한 손씨측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도 있겠지만, 이 지역 사족들과 이씨들이 혼인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는 점이 보다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05靑松松鶴書堂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靑松松鶴書堂 堂長 趙奎洛 외 29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으로 손씨측이 景節公實紀를 杜撰한 것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一家의 사사로운 정으로 先賢들이 公議로서 집필한 것을 後生들이 감히 改塗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晦齋景節公은 舅甥간으로 회재가 어린 시절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면서 은혜를 입었기에 그 애뜻한 마음은 後人이 감히 容議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李象靖이 지은 상량문에 ‘淵源道脉’ 4字를 넣는 것은 매우 엄중하고 큰일인 관계로 大山 本家에서도 當日 勘定하여 내려 보낸 것이었는데, 이는 그 두 분의 사이를 짐작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淵源이라는 것은 衆流의 大本이며, 道脉은 오직 하나로 이어져온 密符이기에 사람의 됨됨이가 안 된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고, 또한 가문의 됨됨이가 안 된 가문에는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퇴계회재의 행장을 서술하며 위로 授受한 바가 없고, 정조가 제문을 내릴 때에도 師承이 없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은 모두 聖賢들에게서 나온 公筆이기에 후인이 감히 글을 添削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같은 곳(良洞)에 살면서 서로 언행을 조심하지 않고 창으로 찌를 듯이 다투는 형상을 지켜보니, 모두 被髮이 되어서야 끝날 것 같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해보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비록 그러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 是非의 중간에 援兵으로 들어가 今日에 감히 말참견을 한다면, 그 상량문의 내용은 60년 전에 이미 헤아려서 勘定한 것으로써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원컨대 僉尊들이 公議로써 이전으로 되돌리도록 調停한다면 흡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되돌린다는 것은 重刊本(原本)의 불필요한 글을 지우고 그것을 改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송학서당은 이전까지 도래한 여타 校院들에 비하여 보다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씨측에 대하여 보다 직설적인 비판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응은 이 서당이 大院君 훼철이전에 퇴계를 主享으로 하고 있었던 서원으로서 퇴계가 撰한 회재 行狀을 무시한 손씨측이 좋지 않게 보였던 것도 있겠지만, 이 지역 사족들과 이씨들이 혼인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孫李是非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통문에 소개되지 않은 손이시비의 개요를 살펴보면,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跋文과 詩를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松鶴書堂을 통해 청송지역 사림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松鶴書院은 退溪 李滉과 鶴峰 金誠一, 旅軒 張顯光의 학문을 전수하고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明智齋 閔樞가 세운 明智齋書堂이 그 효시이다. 1631년에 서당이 화재로 전소된 후 1702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서당을 모태로 하여 당저(현 명당3리)에 송학서원을 창건하면서, 서당을 함께 이건·합병하게 되었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지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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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05년 송학서당(松鶴書堂) 통문(通文)
靑松 松鶴 通文
右通諭事伏以吾道傳授之[鉢]非一家私情所可擬議先賢公業之筆非後生臆見所敢改塗故程朱子集中改字朱子非之備
文正碑文曲折歐公[解]之則古都上下之間安知無矯捄辨析之君子而至使一省侶紳復擧去乙巳之筆也夫晦齋先生之於 景節公
親爲甥舅而早聞義方則其誨養之澤恩[愛]之篤非後人所敢容議然至若偉頌中淵源道脉四字所係甚重所關甚大湖
上當日下筆亦豈無斟酌啇量於其間耶夫淵源者衆流之大本也道脉者三昧之密符也非人人所授亦非家家所傳故 老
先生敍狀曰上無所授 正廟朝賜侑曰不由師承皆出於聖賢公筆則後之人將捨此而何求哉窃念同室之地戈㦸相尋交[璧]
之處肥[瘠]如視則終有被髮難救之慮生等雖不敢自列於是非中援兵敢爾容喙於今日者不變其六十年已勘之
論故也伏願 僉尊務歸調停浞其原本刪去改本則吾道幸甚斯文幸甚
右通通
玉山書院
乙巳六月日松鶴書堂 堂長幼學趙奎洛
有司 趙應斗
閔泳昱
會員 李宜洙
趙性龜
閔三植
李湕
趙性格
權鐔
趙性極
閔後鎬
趙性瓚
閔泳泰
趙性宅
閔泳根
趙世奎
趙性漢
李相一
趙性洛
張龍漢
趙龍泰
李禎富
趙性台
趙成奎
閔泳憲
趙性鎬
趙性瀅
閔泳晟
趙奎元
李相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