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仁同不知巖精舍 會中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인동의 부지암정사(동락서원)에서 張龍灝 외 43명이 연명으로 보내온 것으로 손씨측이 도학연원과 관련된 내용을 경절공실기에 부기하여 간행하려는 것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대산 이상정이 찬술한 문제가 된 상량문의 도학연원 문구를 당시에 勘定하였고, 이전에 정조도 侑文에서 師承이 없다했으며, 퇴계도 회재의 행장을 찬술하면서 학문을 授受한 곳이 없다고 하였는 것을 손씨들이 융통성없이 고집을 부려서 실기에 的受하였다는 문구를 넣어 같은 동네에 사는 두 집안에 분란을 야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집안의 是非에 궤입하여 어느 한 집안과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꺼려하여 결국 자신들은 (경주)사림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는 이 두 집안이 갖는 경상도내의 위상과도 직결된 것으로 16세기 이래로 여주이씨들이 경주손씨에 비하여 그 가문의 격이 보다 높아졌다고 하지만, 손씨들 또한 道內 士林들과 世誼를 맺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비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여주이씨, 옥산서원, 대산종가 및 고산서당 등에서는 손씨측을 강력히 성토하는 입장인 반면, 여타 서원(당) 및 문중에서는 손씨측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도내를 대표하는 두 집안의 갈등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孫仲暾과 李彦迪 舅甥간의 학문적 연원 문제로 야기된 孫李是非는 도내 사림들 및 京鄕 각지로 확대되면서 손씨측을 압박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 시비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이 시비의 개요는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3인의 詩와 跋文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 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이씨측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다소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던 부지암정사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동락서원은 旅軒 張顯光(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5년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1601년에 장현광이 지은 不知巖精舍 자리에 세웠다. 1676년 東洛書院으로 사액되었다. 동락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이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32년 사당을 중건하였고, 1933년에 晩悔堂 張慶遇를 종향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