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龍宮郡의 龍宮鄕校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龍宮鄕校 會中에서 鄭斗燮 외 32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으로 손씨측이 景節公實紀를 杜撰한 것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향교측은 淵源正脉은 斯文의 公議로 정해진 것으로 一家에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말할 바가 아니며, 동시대에 서로 道義를 나란히 하는 것을 從遊라 하며, 다른 시대에 전수하지 아니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私淑이라고 하는데, 감히 淵源道脉의 근거로서 자손들의 입으로 그러한 것을 덧붙여 評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대개 古今天下에 公이라 이르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하나로 된 大統을 일컫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晦齋가 愚齋의 집에 서로 있으며 舅甥사이에 다소나마 기르고 가르친 은혜가 있기에 있다는 것이지 거기에 부당한 뜻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에게 이르러 先意에 복종치 않고 이에 藉重한 것을 뒤집어서 분간하기 어려운 글을 지은 것도 분수에 지나치는데, 私意가 넘쳐서 ‘淵源道脉’이라는 문구를 지어서 부르고, 남몰래 함부로 實蹟에 전파하기를 요구하니, 이것이 바로 義理와 事體를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손씨측을 강력히 성토하고 있다. 용궁향교 측은 손씨측을 논박하는 근거로 先王의 祭文과 大賢의 狀文에서 이미 授受한 바가 없이 濂洛에 바로 이어진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나아가 손씨들이 명확한 증거가 있음에도 一家의 사사로운 恩意로 斯文의 公議를 害함에 이르고, 변설로서 천하와 싸우려는 망극한 작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私恩과 公議는 별개의 것인데도 손씨들이 舅甥간의 작은 私恩을 가지고 그것이 斯文의 正統을 뜻한다고 우기니 현재의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라 한탄하였다. 향교 측은 더 나아가 兩家에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이씨측은 손씨측의 허망한 문구에 일일이 쟁변할 필요가 없고, 손씨들은 誨養한 私恩을 憑藉하여 경절공실기에 杜撰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옥산서원 사림들이 손씨들에게 정중히 문제의 판본을 毁削하도록 措處하여 同室간에 화해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용궁향교에서는 晦齋와 愚齋 舅甥간의 私恩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道統을 전수했다는 뜻은 아니기에 손씨측이 중간한 실기의 ‘淵源道脉’ 문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현재 兩家의 시비를 종결하기 위해 손씨측이 문제의 판본을 없애서 분란을 종결해야 한다고 하였다.
孫李是非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跋文과 詩를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했던 龍宮鄕校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용궁향교는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어 있다. 1398년에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1636년에 세심루를 다시 지었다.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