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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빙계단소(氷溪壇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905.4713-20120630.Y125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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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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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주상, 빙계단소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길 80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58 X 34.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5의성군빙계단소에서 경주옥산서원으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발송한 통문
이 통문은 의성빙계단소에서 을사(1905)년 12월에 단장 김주상 외 44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으로 사문의 대론을 어지럽힌 잘못을 바로잡고 그를 주도한 손씨들을 성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통문을 보면, 을사(1845)년 우재의 본손이 실기를 영간할 당시에 동강서원 대들보에서 나온 글이라면서 회재우재의 학문을 이어받았다는 이른바, ‘적수방계’의 설을 실기에 증보하면서 양가의 시비가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금과 선현을 무고하는 바가 정도를 넘어서 양가 사이에 매우 큰 틈이 생겼는데, 대산이 지었다는 상량문을 찾는데 이르러 그 원본을 잃어버렸다고 하니 도내에서 손씨를 성토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여론이 끓었다고 하였다. 사림들이 변무를 요구함에 이르자, 손씨 가문의 늙은이들이 모여 논의하며 말하기를 이 문자를 간행할 것이라고 하고, 사림들은 이전의 글에 더하거나 빼는 것이 불필요하기에 간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종 서로 흉흉하게 싸우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그 아비들이 마음을 돌려 아들에게 권하고, 그 손자는 조부의 지도를 힘써 따르니 순리대로 화목하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처럼 60년 전에 발생하였던 손이시비는 비록 道內의 여론에 굴복하여 손씨들이 도학연원과 관련된 내용을 삽입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언제든지 문제의 소지는 품고 있었던 것이다.
60년 만에 다시 일어난 손이시비는 경주 향내를 벗어나 도내 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시비가 재발한 그 해 말에 빙계단소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손씨들을 강력히 성토하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이들은 완전하지 않은 글을 믿고 의지하여 이를 단서로 분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증보한 실기의 판목을 훼판하여 버려야 하며, 현재 이러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필히 옛날에 문제를 일으킨 늙은이들의 자손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현재 손씨들보다 옛날의 성효가 더 낫다고 하면서, 과거에 의리가 지금은 같은 것일 수 없다고 하였다. 즉, 과거에는 이들의 잘못을 합의하여 넘어갔지만, 현재에는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실기에 ‘의방’이라는 글귀를 버리고 ‘도맥’이라는 글자를 넣어 두찬한 잘못의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아득히 높아서 후생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회재의 이름을 임의로 아래에 적은 것은 사문의 변란으로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이에 한, 두 명의 글을 내세운 것은 모두 정리를 앞에 내세워 반발을 막아보자는 것으로 손씨들이 세세한 것까지 지휘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하였다. 이는 옳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론을 현혹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자신들이 유림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사문의 대론에 수수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에 앞서 고루한 말들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공의를 더 넓게 모아서 손씨들을 성토하고 그 판본을 훼판하여 두찬으로 인해 다가올 폐단을 막길 바란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05義城郡氷溪壇所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義城氷溪壇所에서 乙巳(1905)年 12월에 壇長 金冑相 외 44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으로 斯文의 大論을 어지럽힌 잘못을 바로잡고 그를 주도한 손씨들을 聲討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가 된 孫李是非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하였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빙계단소에서 보내온 통문에도 1845년 당시의 시비발생과 그 해결안을 근거로 현재 분쟁을 야기하는 손씨측을 논박하고 있다. 이를 보면, 乙巳(1845)년 愚齋의 本孫이 實紀를 營刊할 당시에 동강서원 대들보에서 나온 글이라면서 회재우재의 학문을 이어받았다는 이른바, ‘嫡授旁繼’의 說을 실기에 증보하면서 兩家의 시비가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금과 선현을 무고하는 바가 정도를 넘어서 兩家 사이에 매우 큰 틈이 생겼는데, 大山이 지었다는 상량문을 찾는데 이르러 그 원본을 잃어버렸다고 하니 道內에서 손씨를 성토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여론이 끓었다고 하였다. 사림들이 卞誣를 요구함에 이르자, 손씨 가문의 늙은이들이 모여 논의하며 말하기를 이 문자를 간행할 것이라고 하고, 사림들은 이전의 글에 더하거나 빼는 것이 불필요하기에 간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始終 서로 흉흉하게 싸우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그 아비들이 마음을 돌려 아들에게 권하고, 그 손자는 조부의 지도를 힘써 따르니 순리대로 화목하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처럼 60년 전에 발생하였던 손이시비는 비록 道內의 여론에 굴복하여 손씨들이 도학연원과 관련된 내용을 삽입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언제든지 문제의 소지는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跋文과 詩를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道脉淵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60년 만에 야기된 손이시비는 향내를 벗어나 도내 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시비가 재발한 그해 말에 빙계단소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손씨들을 강력히 성토하는 내용의 통문을 옥산서원 측에 보내온 것이다. 이들은 완전하지 않은 글을 믿고 의지하여 이를 단서로 분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증보한 실기의 판목을 훼판하여 버려야 하며, 현재 이러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필히 옛날에 문제를 일으킨 늙은이들의 자손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현재 손씨들 보다 옛날의 誠孝가 더 낫다고 하면서, 과거에 義理가 지금은 같은 것일 수 없다고 하였다. 즉, 과거에는 이들의 잘못을 합의하여 넘어갔지만, 현재에는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實紀에 義方이라는 글귀를 버리고 道脉이라는 글자를 넣어 杜撰한 잘못의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아득히 높아서 後生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회재의 諱를 임의로 下筆한 것은 斯文의 변란으로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이에 한, 두 명의 글을 내세운 것은 모두 情理를 앞에 내세워 반발을 막아보자는 것으로 손씨들이 세세한 것까지 지휘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하였다. 이는 옳지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士論을 현혹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자신들이 章甫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斯文의 大論에 수수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에 대략 고루한 말들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公議를 더 넓게 모아서 손씨들을 성토하고 그 판본을 훼판하여 杜撰으로 인해 다가올 폐단을 막길 바란다고 하였다.
실제 이듬해인 丙午(1906)년부터 이씨측은 손씨측을 압박하는 강도를 높여 나갔다. 1906년 1월 11일에 양동 이씨들은 동간단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동강단소 說壇修契 시에 附載했던 이씨들의 명첩을 삭제하여 돌려달라는 단자를 동강단소에 보내는 한편, 이씨측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 향내 문중에 대해서도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시비가 확대, 격렬해지는 가운데 이만도 등 3인에게서 회재 행장에 퇴계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이씨가 杜撰한 것이라는 설이 나오고 손씨측에서는 『晦齋集』을 破板해야 한다는 설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유림들은 통문을 통해 이 일에 관계되는 자를 世德祠에 이름을 걸어 施罰하고, 나아가 모두 영구히 儒籍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손씨의 실기를 私刊으로 간주하여 모두 환송하고 나아가 파판하자는 등 압박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처럼 시비가 도내 전역으로 확대되어 더욱 격화되면서 太學湖西儒生, 湖南儒會所, 京約所會中, 京南村儒會에서도 慶州鄕校로 통문을 보내 손씨측을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이처럼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및 태학과 전국 유생들의 성토가 이어지자, 당초 손씨측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이 이씨측으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이시비와 관련한 氷溪壇所의성지역 사림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氷溪書院은 155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金安國·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6년에 ‘長川’이라고 사액되었다가, 1600년에 移建하면서 ‘氷溪書院’으로 개칭하였다. 1689년 金誠一·柳成龍·張顯光을 추가배양 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68년에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한 복원공사가 2006년 5월에 완공됨에 따라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이건의 공적을 기려 鶴洞 李光俊을 추향함으로서 6현을 봉향하고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5년 빙계단소(氷溪壇所) 통문(通文)
氷溪
義城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道學淵源是斯文之一大關棙雖父子兄弟不可私相與受況舅甥乎恭惟 晦齋文元公早違庭訓{齒+召}年造詣舅氏之力就不曰不
多及其體段已具有志於向上工夫得不傳之緖於考亭闇然日章德符于行炳然筆出言垂于後
正廟朝親製侑文昭如日星而云不由師承 老先生狀行述文重如彛鼎而云㘝有淵源則豈非吾東方百世公案乎在昔乙巳 愚齋本孫營刊實紀
以嫡授旁繼之說刱出樑欐誣祖誣賢極涉未安因此而兩家 釀成釁隙至有湖文之覓去本單道通之沓至卞誣孫門老成之論曰此文之刊與不刊於
吾先祖不必爲加損而終始相閧當爲十分啇諒處幡然改悟父勉其子祖諭其孫務順歸和矣復何六十年之後惹起閙端憑信斷爛之簡營補
毁棄之板窃想今日主論之人必昔年老成之子若孫今日之誠孝有愈於昔日而然耶昔日之義理不若乎今日而然耶 削去義方句演入道脉字難免杜
撰之責有甚於此以藐甭後生莫重諱啣任意下筆斯文之變莫此極矣間有一二立幟皆情面瑣瑣指疑爲似變贋爲眞眩惑士論此猶掩耳偸
鈴而欲遮他人之禱也漢儒之傳會周書之僞誓終歸於亂經之科則世有公眼必有卞白者矣生等忝在章甫之列斯文大論不可袖手岸視故略陳蒭蕘之說
伏願 僉尊愽採公議聲討毁板以杜來世之弊吾黨土來甚斯文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乙巳十二月日氷溪前壇長金冑相
李逵在
朴眞宅
李元祐
李章鉉
柳弼榮
任魯宰
朴祥弼
朴相一
李元在
朴南基
金夏裕
金禹鍾
李泰陽
金{王+表}
李元鎭
柳周榮
南重鎭
權大稷
李長綱
李苾坤
朴圭煥
朴柱國
李雲在
朴泰煥
朴寅煥
朴彩淳
李章奭
吳秉德
金起鍾
權大翼
權玲
金典相
任瓚宰
李東坤
李泰一
吳正銖
李章禹
朴廷弼
金有鍾
金凞國
朴柱喆
任相鎬
李寅植
金文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