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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도잠단소(道岑壇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905.4713-20120630.Y1250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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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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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조병소, 도잠단소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399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58.2 X 35.4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5영천군도잠단소에서 경주옥산서원으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발송한 통문
이 통문은 영천도잠단소에서 을사(1905)년 12월 15일에 당장 이기찬 외 23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은 공의로서 옛날에 감정하여 확정한 문자로서 손씨들이 중간한 실기의 문구를 새로 고치도록 하여 다시는 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 도잠단소에서는 근래에 듣기로 손씨들이 실기를 중간하면서 상량문의 내용을 고치고, 회재우재를 위해 지었다는 장문을 증보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정론을 바꿔 새겼다는 평가를 일컫는 것이며, 아울러 몇몇 사람의 글을 내세워 사림들 간의 정리도 어지럽히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자신들이 생각하건대 사림들이 존모하고 추숭하는 것이 두 선생 사이에는 없었으며, 함께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같이 닦아서 양가에서 서로 한 몸처럼 보호하는 것은 ‘의리’라고 하였다. 이어서 ‘공론’이라는 것은 감히 사사로이 편향될 수 없으며, 하물며 이미 옛날의 선배들이 정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는 실기를 중간하면서 ‘의방’이라는 글을 ‘도맥’이라고 고친 손씨측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손씨측이 이미 60여 년 전에 같은 일로 분쟁을 야기하여 사림들이 논의하여 정리가 된 부분을 새롭게 보강하여 현재에 이르러 같은 문제로 다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유림의 계열에서 매우 의외의 것이기에 모두가 일제히 경계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첨존들이 공의를 새롭게 하여 거듭 옛 문자의 뜻을 통보하여, 저 손씨 가문이 이미 감정한 일로 다시 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05永川郡道岑壇所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永川道岑壇所에서 乙巳(1905)年 12월 15일에 堂長 李起瓚 외 23명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은 公議로서 옛날에 감정하여 확정한 문자로서 손씨들이 重刊한 實紀의 문구를 새로 고치도록 하여 다시는 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 나아가 회재의 도학연원에 대하여 이미 정조의 제문과 퇴계가 지은 행장에서 이미 찬술해 놓았기에 後學들이 이를 尊信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인 즉,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대산이 지은 동강서원 상량문의 내용에 달리 기술되면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때 문제가 되었던 문구가 있는 원본은 대산 본가로 다시 돌려보내 그 부분을 지운 후 대들보에 넣었는데, 그 수정된 내용이 당시 실기를 간행하는데 부기되어 간행된지 근 백년이 흘렀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1773(癸巳)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에 관한 것으로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本家로 還推하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景節公實紀』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잠단소에서는 근래에 듣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紀』를 중간하면서 상량문의 내용을 고치고, 회재우재를 위해 지었다는 狀文을 增補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始終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正論을 바꿔 새겼다는 평가를 일컫는 것이며, 아울러 몇몇 사람의 글을 내세워 사림들 간의 情理도 어지럽히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상량문과 장문의 杜撰으로 인해 발발한 양 문중간의 시비는 이후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 문제의 발단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跋文과 詩를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道脉淵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도잠단소의 통문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단소 측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건대 사림들이 존모하고 추숭하는 것이 두 선생 사이에는 없었으며, 함께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같이 닦아서 兩家에서 서로 한 몸처럼 보호하는 것은 義理라고 하였다. 이어서 公論이라는 것은 감히 사사로이 편향될 수 없으며, 하물며 이미 옛날의 선배들이 정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는 실기를 중간하면서 ‘義方’이라는 글을 ‘道脉’이라고 고친 손씨측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손씨측이 이미 60여 년 전에 같은 일로 분쟁을 야기하여 公議로 정리가 된 부분을 새롭게 보강하여 금일에 같은 문제로 다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儒林의 계열에서 매우 의외의 것이기에 모두가 일제히 경계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僉尊들이 公議를 새롭게 하여 거듭 옛 문자의 뜻을 통보하여, 저 손씨 가문이 이미 감정한 일로 다시 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처럼 60년 만에 야기된 孫李是非는 鄕內를 벗어나 道內 전체로 확산되는 양상이었는데, 시비가 재발한 그해 말에 道岑壇所에서 보내온 손씨들을 성토하는 통문은 이후 옥산서원측이 손씨를 압박하는 강도를 높이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씨측은 이듬해인 丙午(1906)년부터 손씨측을 압박하는 강도를 높여 나갔던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1906년 1월 11일에 양동 이씨들은 동간단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동강단소 說壇修契 시에 附載했던 이씨들의 명첩을 삭제하여 돌려달라는 단자를 동강단소에 보내는 한편, 이씨측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 향내 문중에 대해서도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시비가 확대, 격렬해지는 가운데 이만도 등 3인에게서 회재 행장에 퇴계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이씨가 杜撰한 것이라는 설이 나오고, 손씨측에서는 『晦齋集』을 破板해야 한다는 설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유림들은 통문을 통해 이 일에 관계되는 자를 世德祠에 이름을 걸어 施罰하고, 나아가 모두 영구히 儒籍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손씨의 실기를 私刊으로 간주하여 모두 환송하고 나아가 파판하자는 등 압박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처럼 시비가 도내 전역으로 확대되어 더욱 격화되면서 太學湖西儒生, 湖南儒會所, 京約所會中, 京南村儒會에서도 慶州鄕校로 통문을 보내 손씨측을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이처럼 이씨측을 지지하는 도내 및 태학과 전국 유생들의 성토가 이어지자, 당초 손씨측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이 이씨측으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이시비와 관련한 永川道岑壇所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道岑書院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건립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612년 모사리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지봉서원이라고 하였다. 1678년 용호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道岑’이란 편액을 받아 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후 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되고, 1914년 복원되어 1981년 보수 정화 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神道碑와 下馬碑가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5년 도잠단소(道岑壇所) 통문(通文)
永川 道岑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古今雖殊其跡寔同耳目誠異其識則齊跡同而評殊不得以言評評正而飜則情理幷亂由此觀之 貴鄕孫李氏兩家
是非豈非是歟 文元先生道學之不由師承且淵源之無授受處等語已著於 正廟侑祭文與 退翁狀德之撰而爲後學之尊
信也 大山先生東院梁頌乍書旋刪原本納之梁而以此實記之刊行于世近百載斯文之幸矣近聞孫氏重刊實記梁頌之改補與狀文之
增刊始終逈異云眞所謂評正飜而情理幷亂者也竊惟士林之尊慕推崇無間於兩 先生也又同[脩]之愛惜相護一體於兩家而義理
公論則不敢偏私自由況已爲斷案於古人之正論而更閙於今日者甚意外事係儒林故齊聲警厲望須 僉尊更張公議使之仍舊
文字之意通于彼家勿爲更閙於已勘之事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乙巳十二月十五日道岑壇所堂長敎官李起瓚
有司幼學鄭致愈
曺秉直
曺啓守
安彦直
曺啓憙
曺喜淵
金瓚奎
曺和承
曺秉五
安華洙
生員曺秉韶
幼學曺裵煥
曺秉華
安基遠
成守鎭
參奉曺秉文
幼學曺喜元
李寅厚
成勳鎭
曺秉沇
曺瑛煥
曺喜貞
曺秉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