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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고산서당(高山書堂) 회통(回通)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905.4713-20120630.Y1250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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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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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기락, 김익락, 김도화, 고산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58.5 X 35.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5년 회재 이언적의 학문적 연원문제를 두고 경주양동마을의 여주이씨와 경주손씨 간에 있었던 시비에 대해서, 안동고산서당의 입장을 적어서 경주양동경산단소로 발송한 통문
이 통문은 1905년 4월 29일 안동고산서당에서 경산단소로 회송한 것으로 경상도 3대 시비의 하나인 ‘손이시비’에 관한 것이다. 이 시비는 우재 손중돈의 후손들이 그의 문집을 중간하면서 사사로이 회재 이언적의 학문이 외숙부인 손중돈에게 연원한다는 내용을 넣으면서 발생하였다. 시비의 핵심은 손중돈의 실기를 중간하면서, 그 근거로 들었던 이상정이 지은 동강서원 중건 상량문내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삭제한 내용을 사사로이 넣었고, 나아가 손씨측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문을 게재하였다. 여기에 실기 중간의 실제적 사유가 되었던 여주이씨 종가(무첨당)에서 발견되었다는 회재손중돈을 위해서 직접 지은 장문과 만사의 내용을 삽입하면서, 함부로 회재의 이름을 적었다는 것이다. 이 통문을 보낸 고산서당이상정을 제향하는 곳으로서, 이상정의 상량문 내용 중 회재의 학문연원과 관련된 부분은 18세기 당시에 이미 감정하여 빠진 것임에도 손씨측이 사사로이 문집에 부주한 것은 선현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나아가 5월에 있을 옥산서원 묘우 중건 도회에서 이러한 손씨측의 잘못을 분명히 밝히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성토하고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05安東高山書堂에서 慶州景山壇所로 발송한 것으로, 1904년에 重刊된 景節公實紀李彦迪의 학문 淵源을 임의로 기재한 慶州孫氏를 비판한다는 내용의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1905년 4월 29일 安東高山書堂에서 景山壇所로 回送한 것으로 경상도 3대 是非의 하나인 孫李是非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은 愚齋 孫仲暾의 후손들이 그의 문집을 중간하면서 사사로이 李彦迪의 학문이 外叔인 孫仲暾에게 淵源한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은 이미 大賢들이 논의하여 정한 글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이며 또한 사림의 公議를 무시한 것이기에 이를 玉山書院 廟宇 重建 道會시에 논의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慶州지역내 孫李兩姓 간에 孫仲暾李彦迪 舅甥간의 학문적 연원 문제로 야기된 孫李是非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면서,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詩와 跋을 얻어 싣고 이를 반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손씨측이 이 실기를 중간하면서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문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향내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이 시비에 대한 향내의 여론은 이씨측의 압도적인 우세로 전개되었다. 1905년 5월에 옥산서원體仁廟 중수가 끝나고 還安하는 도회가 있었다. 이 鄕道 公會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손씨측에 대한 대응방안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이 통문을 발송한 고산서당李象靖을 제향하는 곳으로 문제가 되었던 상량문의 내용을 임의로 문집에 附註한 것은 先賢의 뜻과 상반되는 것임을 천명하고, 東江書院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발송한 통문을 停罷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5월에 있는 옥산서원 묘우 중건 新會에서 널리 정상을 논의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향전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향전은 시기와 지역별로 그 내용이나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영남지역의 경우 仁祖反正, 甲戌換局, 戊申亂을 거치면서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히고 여기에 執權老論이 嶺南南人 견제책의 일환으로 향촌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생존권 차원에서 향촌사회에 대한 관심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타 지역에 비하여 더욱 확산되고 또한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과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이중 손이시비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이씨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고산서당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손이시비의 발생원인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가치가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5년 고산서당(高山書堂) 회통(回通)
安東高山書堂高山 通文
右文爲回諭事伏以大賢已定之論非後人之所敢增損文字粧撰之習豈尊祖之可得瞞過哉伏承 尊諭
今孫氏之施措不覺寒心而在儒林之處義合置痛闢者也 大山先生樑頌已有當日勘定而亦爲本家之還推則
今此手墨於何處得來而參錯已私改換頭面將爲廣布傳信之計者誠踈且愚矣巧反拙矣在 僉尊地不必
爭卞而一世之耳目難掩百代之公議自在似非士林之參涉尃出子孫之杜撰則沒見識無忌慱 來諭己盡之矣方
爲發通於東院竣辭以停罷焉固無事乎遂條以供對也且 玉山廟貌重新會席在前慱正(象)論務歸停當
無使孫氏自就遂非之科則不徒爲兩家之幸而斯文幸甚
右回通
景山壇所 乙巳四月二十九日高山書堂 都有司 幼學 李基洛
齋有司 金益洛
李德珪
會員 前都事 金道和
幼學 李承述
通政 金重輝
幼學 李贊燾
金啓洙
進士 金景洛
幼學 李鍾夏
李敦浴
南錫恒
李重明
南極壽
李義洛
金冕輝
柳憲鎬
李{王+泰}
金象鍾
南極和
李宅洛
參奉 南敬凞
幼學 李岱榮
南錫愚
柳淵學
權準東
李亨珪
注書 金鴻洛
進士 金浩直
幼學 張景栻
李萬來
進士 柳東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