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大邱洛濱壇所 會中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大邱의 洛濱壇所(東洛書院)에서 崔時敎 외 19명이 연명으로 보내온 것으로 이씨측의 입장에서 손씨측을 논박하고 있지만, 두 집안이 서로 平心으로 논의하여 시비를 해결하길 바라고 있다. 낙빈단소에서는 회재가 스스로 道學을 익혔음을 退溪와 正祖의 행장과 제문, 大山의 상량문에서 이미 말하였고, 또한 손씨들의 先祖들 역시 이를 받아들여 實紀를 간행하였던 것인데 지금 그 후손들이 先代의 遺意를 어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회재가 愚齋를 위하여 지었다는 家狀本이라는 것은 수백 년간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손씨측이 주장하는 家狀의 유래와 증거가 불분명하고 의심스러운 점이 있음에도 함부로 회재의 諱를 그 글의 아래에 적어 실기 안에 附記하는 것은 온 세상을 속이려는 계략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道內 士林의 뜻을 모아 온힘을 다하여 잘못을 밝혀 조그마한 분란의 단서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비록 지금은 이치를 바로잡는 것이 제일이지만, 자신들이 한 마을에 사는 사이를 비난을 하는 것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한편으로 孫李是非와 같은 것이 또 일어날 수 있으니 행동을 어찌해야할지, 또한 그 결론이 어찌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두 가문이 서로 疏遠하고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며, 그들 사이에 어떤 愛惡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兩家가 평심을 가지고 토론하여 함께 문제점을 해결함으로서 대립함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하였다. 즉, 낙빈단소의 사림들은 손씨측이 잘못한 것은 명백하고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制裁를 가함이 맞지만, 兩家가 同室로서 疏遠해짐을 우려하여 다소 마음을 안정한 후 서로 논의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 시비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시비의 대략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3인의 詩와 跋文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 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이씨측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손씨측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성토하지만 同室로서 兩家의 오랜 世誼가 훼손됨을 우려하는 당시 낙빈단소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六臣祠는 死六臣인 朴彭年, 成三問, 河緯地, 李塏, 柳誠源, 兪應浮를 제향하는 곳으로 이전에는 낙빈서원이었다. 1679년에 건립된 낙빈서원은 1694년에 賜額되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 당시 철거되었다가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1974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六臣祠’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