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柒谷泗陽書堂에서 慶州玉山書院으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손씨들이 경절공 실기를 중간하면서 선대에 이미 정리된 회재의 도학연원을 우재에게로 연결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손·이씨 두 집안이 오랫동안 世契가 있었으므로 서로 적절히 양보하여 과거의 우의를 보존하길 바란다는 칠곡 사양서당의 의견을 담고 있다. 孫李兩姓 간에 孫仲暾과 李彦迪 舅甥간의 학문적 연원 문제로 야기된 孫李是非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詩와 跋을 얻어 싣고 이를 반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손씨측이 이 실기를 중간하면서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문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마찬가지로 손씨측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이 문제는 향내가 아닌 도내 전 사림의 문제로 확대되어갔으며, 이후 이 시비에 대한 여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씨측의 압도적인 우세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기 사양서당에서도 손씨와 이씨를 대표하는 동강·옥산서원 측의 통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입장은 先代에서 이미 같은 문제를 논의하여 회재의 도학연원이 우재와 관계없음을 밝혀서 결정한 사항을 손씨측이 사사로이 바꾼 것은 잘못하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오래전부터 자신들과 두 가문과 世誼를 맺어온 관계이며, 일의 관계됨이 매우 엄중하므로 함부로 의견을 내기 어려움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이들 두 가문의 관계자가 本院(사양서당)에 모여 서로 논의하여 일을 바로 잡아서 兩家가 과거의 경계를 해복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즉, 사양서당 측은 이씨들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이 是非로 인해 두 가문의 대립이 극한으로 가는 것을 우려하여 중재를 자청한 것으로 보인다.
사양서당 외에도 손이 양 가문의 상황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은 통문을 발송하기 전 달에 이미 오천정씨측에 의해서 시도 되었다. 鄭基洛·鄭龍洛이 찬한『顚末錄』(영남대 소장본)에는 당시의 전개 상황이 자세히 실려 있어서 참고가 된다. 당시 오천정씨측은 孫李 兩家의 입장을 조금씩 양보하여 절충한 案을 제시하였는데, 이씨측은 이 절충안을 수용치 않고 오히려 손씨측을 압박하는 통문을 내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정씨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양동이씨 측과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 두 가문의 갈등은 1906년 10월 당사자인 정씨가 죽자 그의 아들로 이어져 한때 확대되었지만, 이씨측 일부 인사들의 문상을 계기로 양측간의 화해를 모색하여 이 조정안을 정씨측이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향전은 시기와 지역별로 그 내용이나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영남지역의 경우 仁祖反正, 甲戌換局, 戊申亂을 거치면서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히고 여기에 執權老論이 嶺南南人 견제책의 일환으로 향촌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생존권 차원에서 향촌사회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타 지역에 비하여 더욱 확산되고 또한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이중 손이시비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이씨측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이 시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사양서당의 노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가치가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