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榮川鄕校에서 慶州景山壇所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榮川鄕校에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을 이씨측의 景山壇所로 보낸 것이다. 이들은 大山 李象靖이 찬술한 東江書院 상량문의 ‘義方’이라는 두 글자는 一遵해야 하는 것이며, 이 글은 李彦迪이 외숙부인 孫仲暾을 위해 지은 제문에도 들어있는 확실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씨측의 통문에서 당시에 李象靖이 지어서 돌려보낸 상량문과 내용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손씨들이 그가 죽은 후 여러 번에 걸쳐 ‘義方’이라는 글자를 바꿔 고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淵源’이라는 글을 붙이고, 이 글자도 부족하여 ‘道脉’이라는 글자를 붙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향교측에서는 손씨들이 이 글들을 첨부하여 실기를 출간하려는 이유가 이미 찬술된 實紀에 실려 있는 李象靖의 글을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손씨측이 이렇게 무리를 하여 景節公實紀를 印布하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榮川鄕校에서는 회재의 학문은 退溪가 지은 行狀과 正祖의 祭文에서 이미 授受한 곳도, 師承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斯文 모두의 큰 사안으로서 이 글을 고친 것은 그냥 넘기지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淵源道統이 하등 중요치 않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舅甥 사이에 있는 恩義를 고쳐서 찬술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東江書院의 本孫들 또한 퇴계의 후학이고, 正祖의 신하임을 잊지 않고 있는데 杜撰을 한 이유에 의문을 나타내었다. 결국, 이씨측의 통문에서 말하는 文字를 막무가내로 넣었다는 것은 손씨들이 독단적으로 大山이 지은 상량문에 註를 달아 添入했다는 말인데, 嶺南의 巨族이자 海東의 閥族으로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先祖를 높이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그 정도가 심하여 스스로 슬기로움과 자애로움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僉尊들이 이 일을 상세히 침체된 바를 찾아 비교하여 大義를 어기는 폐단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시비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시비의 대략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년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가 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3인의 詩와 跋文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 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세력 중 하나인 榮川鄕校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榮川鄕校는 1433년 군수 潘渚가 중수하고, 1577년에 군수 李希得이 중수하였다. 해방 후 향교 경내에 영주여자중학교를 설립하여 향교 건물의 일부를 학교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0년 명륜당을 중수하였으며, 대성전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