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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영천향교(榮川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905.4713-20120630.Y125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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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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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박승진, 김석, 김휘택, 영천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명륜길 76 (하망동)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57.5 X 35.4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5영천향교(영주향교)에서 경주경산단소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발송한 통문
이 통문은 영천향교(영주향교)에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을 이씨측의 경산단소로 보낸 것이다. 이들은 대산 이상정이 찬술한 동강서원 상량문의 ‘의방’이라는 두 글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이언적이 외숙부인 손중돈을 위해 지은 제문에도 들어있는 것이어서 확실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씨측의 통문에서 당시에 대산 이상정이 지어서 돌려보낸 내용과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니, 손씨측이 대산이 죽은 후 여러 번에 걸쳐 ‘의방’이라는 글자를 바꿔 고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연원’이라는 글을 붙이고 이 글자도 부족하여 ‘도맥’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실기를 출간하려는 이유는 이미 찬술된 경절공실기에 있는 글을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손씨측이 이렇게 무리를 하여 경절공실기를 인쇄하여 배포하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이어서 회재의 학문은 퇴계가 지은 행장과 정조의 제문에서 이미 전수 받은 곳도, 스승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분들의 말은 곧 사림의 일관된 큰 사안이기에 이 글을 고쳤다는 것은 그냥 넘기지 않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도통의 연원이 하등 중요치 않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외삼촌 손중돈과 조카 이언적 사이의 혈연적 의리에 의해 회재가 손중돈의 제문을 지은 것인데 이 뜻을 어긋나게 해석하여 이언적이 손중돈에게 학문을 전수 받았다고 찬술하는 부분은 분명히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동강서원의 본손들 또한 퇴계의 후학이고, 정조의 신하임을 잊지 않고 있는데 이렇듯 그들의 말을 거짓되게 만드는 내용을 실기에 첨부하여 중간하는 이유에 의문을 나타내었다. 더 말하기를 이씨측에서 통문으로 말하였던 문자를 막무가내로 넣었다는 것은 손씨들이 독단적으로 대산 이상정이 지은 상량문에 주를 달아 넣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향교측에서는 손씨들이 영남의 거족이자 해동의 벌족으로써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선조를 높이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슬기로움과 자애로움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씨측에서 일의 전말을 상세히 비교하여 잘못된 것을 직시하여 사림의 큰 의리를 어기는 폐단이 없게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05榮川鄕校에서 慶州景山壇所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榮川鄕校에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을 이씨측의 景山壇所로 보낸 것이다. 이들은 大山 李象靖이 찬술한 東江書院 상량문의 ‘義方’이라는 두 글자는 一遵해야 하는 것이며, 이 글은 李彦迪이 외숙부인 孫仲暾을 위해 지은 제문에도 들어있는 확실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씨측의 통문에서 당시에 李象靖이 지어서 돌려보낸 상량문과 내용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손씨들이 그가 죽은 후 여러 번에 걸쳐 ‘義方’이라는 글자를 바꿔 고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淵源’이라는 글을 붙이고, 이 글자도 부족하여 ‘道脉’이라는 글자를 붙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향교측에서는 손씨들이 이 글들을 첨부하여 실기를 출간하려는 이유가 이미 찬술된 實紀에 실려 있는 李象靖의 글을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손씨측이 이렇게 무리를 하여 景節公實紀를 印布하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榮川鄕校에서는 회재의 학문은 退溪가 지은 行狀과 正祖의 祭文에서 이미 授受한 곳도, 師承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斯文 모두의 큰 사안으로서 이 글을 고친 것은 그냥 넘기지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淵源道統이 하등 중요치 않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舅甥 사이에 있는 恩義를 고쳐서 찬술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東江書院의 本孫들 또한 퇴계의 후학이고, 正祖의 신하임을 잊지 않고 있는데 杜撰을 한 이유에 의문을 나타내었다. 결국, 이씨측의 통문에서 말하는 文字를 막무가내로 넣었다는 것은 손씨들이 독단적으로 大山이 지은 상량문에 註를 달아 添入했다는 말인데, 嶺南의 巨族이자 海東의 閥族으로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先祖를 높이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그 정도가 심하여 스스로 슬기로움과 자애로움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僉尊들이 이 일을 상세히 침체된 바를 찾아 비교하여 大義를 어기는 폐단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시비의 배경은 李彦迪의 출사와 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외삼촌인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는데 있었다. 시비의 대략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이 撰한 李彦迪 行狀에는 비록 외숙인 愚齋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성리학은 전수받은 곳이 없이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正祖가 찬한 제문에서도 이황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異見없이 이 의견이 전해지다가, 1773(癸巳)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廟宇 중건시에 작성된 大山 李象靖의 廟宇重建上樑文으로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 상량문은 이씨측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當日에 勘定하여 본가로 還推했다. 이후 이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1845(乙巳)년 『愚齋實紀』를 增補하여 간행할 당시에 李象靖이 지은 묘우중건상량문의 삽입 문제로 또 한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상량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05(乙巳)년 『경절공실기』중간에 실린 상량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晦齋愚齋의 道脉을 的授했다는 내용이다. 1845년 당시 손씨측이 이 상량문을 삽입하려고 하자, 이씨측은 강력히 항의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鄕內 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측을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도 상량문 작성시와 마찬가지로 이씨측과 도내 사림의 여론에 굴복해서 손씨측의 의도대로 문집 중간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문제가 양 문중간에 격렬한 시비로 확대된 것은 1904(甲辰)년 이씨 宗家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우재에 대한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손씨측에서 실기를 중간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 4월에 손씨측에서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이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驪江世稿』에 실려 있다고 하는, 이언적이 소찬한 狀文과 輓詞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그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상정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句’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3인의 詩와 跋文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회재의 도맥연원과 관련된 『景節公實紀』가 중간되고 반포되자, 良洞書堂會中에서는 곧바로 인근 鄕內 14문중에 回文을 돌려 1905년 4월 11일에 玉山書院에서 이를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도내 열읍 校院 등처에 통문을 돌려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5월에 있는 玉山書院 體仁廟 還安시 도회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문중에서 이들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이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신흥세력의 성장과 향론의 분열로 인해 사족지배체제가 약화되던 가운데 재지사족 상호간의 향중쟁단인 鄕戰의 한 사례를 알려준다. 19세기 중반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빠짐없이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영남내 是非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慶州의 ‘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은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손씨측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세력 중 하나인 榮川鄕校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榮川鄕校는 1433년 군수 潘渚가 중수하고, 1577년에 군수 李希得이 중수하였다. 해방 후 향교 경내에 영주여자중학교를 설립하여 향교 건물의 일부를 학교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0년 명륜당을 중수하였으며, 대성전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民族文化論叢』42, 이수환,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0.
『수집자료해제집』(3),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2009.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5년 영천향교(榮川鄕校) 통문(通文)
榮川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生等聞祖先有義而不知者不智也知而不揚者不仁也義而知者智也者而知而不審者未知其智也知而揚之者仁也而揚而爽其實者未知其仁也卽伏見
貴壇通諭則 東院偉文 大山李先生所撰而義方二字一遵 文元夫子祭舅氏 景節公文作一副當明的證案故 先生無若時追還改定蓋有以也及其先生之沒
而累度改換義方之不足而換着淵源字淵源之不足而換着道脉字撰出[然]疑間古蹟文字[條]了 景節公實記欲印布而壽其傳多見其不知量也窃
伏惟 文元夫子之學於 陶山狀德之筆 正廟親酹之文旣曰無授受處又曰不[由]師承云爾則斯文一大案斷無踰於是矧乎淵源道統何等莫
重而不可舅甥間恩義換撰而說去也伏想 東院本裔亦 陶山之後學也 正廟之臣子也似無沒覺杜度底事而果如來諭中云云則不敢下半之
文字置之無可奈何而獨於 先生偉樑之文如是懸註而添入耶以若嶠下巨族海東令閥不能眞知的揚而反爽其實欲自歸於未智未仁之
枓必切於尊祖不覺了過度之如何也伏願 僉尊詳諭而沈睖俾無違越大義之弊千万幸甚
右通文
景山壇所
乙巳五月二十二日榮川鄕校掌議金佑榮
齋有司張復羲
金奎燦
公事員
幼學金弼奎
進士朴勝振
曹司幼學李周鉉
鄭柱臣
製通幼學金世洛
丁奎愼
寫通幼學朴昇九
李運淵
權鳳道
金昶鎭
會員前縣監丁大植
幼學金秉吉
金命相
進士金㙽
幼學宋寅鈺
李潤秀
金相烈
張復淳
李炳泰
金聲鐸
金鎔
李彦模
成漢翔
金怒烈
李基夏
李竝轍
吳應轍
進士金輝澤
參奉全奎五
朴齊順
幼學金漢鎭
權成佑
金益秀
宋冑煥
裵永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