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월,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密陽에 있는 禮林齋에서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
1891년 1월,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密陽에 있는 禮林齋에서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禮林齋는 원래 禮林書院이었고, 1567년(明宗 22)에 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밀양 慈是山 아래에 창건한 德城書院이었다. 이를 1634년(仁祖 12) 밀양 부북면으로 이건하면서 禮林書院이라 불렀던 것이고 1868년(高宗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禮林齋로 개편하였다.
星州에 있는 星山李氏 가문의 인물인 李源祚는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고,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후 凝窩先生文集을 간행했다.
그런데 이 문집에 실린 문구에 불만을 제기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다. 즉 白洞에 사는 晴暉堂 李承(1552~1596)의 후예인 李載儀와 李鳳宇가 문집 안에서 晴暉堂을 ‘公’으로 칭한 것에 불만을 품고 강제로 冊板을 훼손한 것이다. 李承(1552~1596)의 본관은 全州이고, 행적이 國朝人物考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실제 凝窩先生文集을 보면 ‘新溪書院追享時告由文’이란 글이 있다. 여기서 ‘公과 師友들은 덕을 갖추어 행실이 온전했고[公維師友 德備行全]’라는 구절에서 李承을 ‘公’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星山李氏 가문에는 이 당시(1896~1897년)에 각지의 향교 등 단체에서 보낸 13건의 통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李載儀와 李鳳宇의 잘못을 성토하고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 禮林齋에서 보낸 본 통문에서는 李載儀와 李鳳宇의 행위를 ‘그들이 칼로 책을 도려낸 것은 스스로 조상의 姓號를 범한 것이고, 그들이 몽둥이로 책판을 훼손한 것은 스스로 조상의 행실을 훼손한 것이다.’라는 말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 李氏들이 이전에도 이와 같은 잘못을 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寒岡[鄭逑]이 지은 武屹九曲이라는 글에 ‘立巖’이라는 글자가 晴暉先生의 遺墟에 있는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고 우긴 것이었다. 그때는 그들에게 글을 보내어 성토하려다가 그쳤으나, 이번에 또 斯文의 變을 일으켰으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있다.
본 通文에 연명한 사람은 齋有司 孫亮大, 朴宜永를 비롯한 39명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