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월 15일,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大邱 鄕校에서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
1891년 1월 15일,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大邱 鄕校에서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星州에 있는 星山李氏 가문의 인물인 李源祚는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고,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후 凝窩先生文集을 간행했다.
그런데 이 문집에 실린 문구에 불만을 제기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다. 즉 白洞에 사는 晴暉堂 李承(1552~1596)의 후예인 李載儀와 李鳳宇가 문집안에서 晴暉堂을 ‘公’으로 칭한 것에 불만을 품고 강제로 冊板을 훼손한 것이다. 李承(1552~1596)의 본관은 全州이고, 행적이 國朝人物考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실제 凝窩先生文集을 보면 ‘新溪書院追享時告由文’이란 글이 있다. 여기서 ‘公과 師友들은 덕을 갖추어 행실이 온전했고[公維師友 德備行全]’라는 구절에서 李承을 ‘公’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星山李氏 가문에는 이 당시(1896~1897년)에 각지의 향교 등 단체에서 보낸 13건의 통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李載儀와 李鳳宇의 잘못을 성토하고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大邱 鄕校에서 보낸 본 통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국 漢나라 때의 대문장가인 昌黎[韓愈]의 아들이 銀자와 根자를 구별하지 못하여 비웃음을 받은 고사가 있다. 따라서 凝窩先生의 문집을 간행할 때, 賢孫은 교정에 신중을 가하여 그런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교정에 신중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白洞의 李氏들이 이미 간행한 책판에 도끼질하고 책에 칼질을 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라서 한 고을 뿐 아니라 이웃 고을에도 이야기가 전해졌다. 星州 鄕校의 어르신들은 같은 고을에 살고 있으니 같은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大邱 鄕校는 이와 같이 말하고, 星州 鄕校에게 士風을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본 通文에 연명한 사람은 都有司 全錫斌, 掌議 崔廷暭를 비롯한 49명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