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12월 10일,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知禮 朔洞에 사는 星山李氏 문중 사람들이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
1896년 12월 10일, 凝窩 李源祚(1792~1872)의 문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知禮 朔洞에 사는 星山李氏 문중 사람들이 星州 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星州에 있는 星山李氏 가문의 인물인 李源祚는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고,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후 凝窩先生文集을 간행했다.
그런데 이 문집에 실린 문구에 불만을 제기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다. 즉 白洞에 사는 晴暉堂 李承(1552~1596)의 후예인 李載儀와 李鳳宇가 문집안에서 晴暉堂을 ‘公’으로 칭한 것에 불만을 품고 강제로 冊板을 훼손한 것이다. 李承(1552~1596)의 본관은 全州이고, 행적이 國朝人物考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실제 凝窩先生文集을 보면 ‘新溪書院追享時告由文’이란 글이 있다. 여기서 ‘公과 師友들은 덕을 갖추어 행실이 온전했고[公維師友 德備行全]’라는 구절에서 李承을 ‘公’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星山李氏 가문에는 이 당시(1896~1897년)에 각지의 향교 등 단체에서 보낸 13건의 통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李載儀와 李鳳宇의 잘못을 성토하고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星山李氏 문중 사람들은 李載儀와 李鳳宇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성토하고 있다.
우선 ‘先生’이라고 칭하거나 ‘公’으로 칭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 位가 先生에 있으면 어찌 先生이라고 하지 않고 公이라고만 칭했겠으며, 그 體가 賢公하면 어지 公이라 하지 않고 先生의 禮로 대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朱子도 子瀜와 方叔은 ‘二公’이라고 말했고, 南湖와 方山은 ‘兩先生’이라고 높였던 것이다. 따라서 定憲公[李源祚]이 晴暉堂을 위해 지은 글에서 先生이라고 하지 않고 公이라고 한 것은 그를 趨向하는 뜻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李載儀와 李鳳宇는 鄭重한 文字만 생각하고 문집을 칼로 자르고 잘라버린 행동은 학문하는 사람의 禮가 아니며 선조를 높이는 것도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어서 이들을 죄를 일제히 성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본 通文에 연명한 사람은 李秉浩, 李章柱을 비롯한 20명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