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末 慶州鄕校의 제반 사항 등이 기록된 문서로 경주군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된 조사표
내용 및 특징
慶州鄕校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各公文編纂綴」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된 고문서(23건) 중의 하나이다. 본 문서는 일종의 조사표로 경주향교의 제반 사항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1908년 이후 작성 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는 일제가 향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자료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경주향교에 명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일제는 한말 향교의 제반 업무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관을 통해 鄕校田畓을 조사케 하였다. 이 외에도 일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향교를 통제하기 위해 향교에 대한 제반 사항을 조사 보고케 하였다. 경주향교 역시, 「各公文編纂綴」에 따르면 1909년 5월 帖諭 第129號를 통해 경주향교 소유 전답에 대한 조사를 보고토록 지시하는 등 향교 운영의 전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본 慶州郡鄕校事例調査表도 이러한 일제의 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지침에 따라 경주향교에서 경주군수에게 보내기 전, 草稿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표에는 경주향교의 인적,물적 사항 등이 古代,近代,現代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다. 모두 12항목으로 任員, 賜牌結卜幾許, 享祀一个年幾次, 一个年二次, 祭需, 儒林校生(鄕飮禮,儀禮式,設講何所,論題何經書), 任員任免期限, 校任差帖規式署押形樣, 地主官의 何時展謁, 校宮基地, 任員何時會同, 入直與否가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각 항목은 古代,近代,現在로 구분되어 있는데 구분 기준은 확실치 않으나 古代는 조선왕조 때 실시되었던 향교의 節目에 따른 規式인듯하며, 近代는 20세기 전후 일제의 간섭이 있었던 시기, 現在는 1910년 일제강점기를 전후 일제가 향교 운영을 본격적으로 통제하던 시기인 듯하다. 이를 통해 시기적으로 경주향교의 운영 사항을 비교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항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임원의 경우 古代는 都有司 1명, 掌議 2명, 色掌 1명, 校生 60명, 守僕 2명, 下隸 50명, 婢子 20명이었는데, 近代가 되면 나머지는 仝上이나 교생 若干, 守僕 1명, 下隸 7명, 婢子 4명으로 축소되고, 현재에는 都有司,掌議,色掌,校生,婢子가 모두 없어지고 廟直과 下隸만 각각 1명씩 존치된다. 토지의 경우도 고대에는 賜牌가 8결 2부 9속이고 畓이 500두락. 田이 400두락이었으나, 近代와 現在에는 賜牌를 月城小學校 설립 시 기부해 버리고, 畓은 246두 2승락, 田은 297두 7승락으로 축소되고 만다. 儒林校生의 여러 의식도 古代와 近代에는 鄕飮禮가 연 1,2차, 設講이 每月朔望兩次 이루어졌으나 現代에는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일제의 향교 통제정책에 의해 운영이 많이 열악해지고 위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구한말~일제시대 일제의 향교 통제 정책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 문서는 일제가 향교 운영을 통제해 가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향교 운영이 위축되는지 상세히 나타난다. 문서에는 향교의 인적구성, 경제력, 제의적 기능, 강학적 기능 등을 구분하여 시기적으로 양적 축소 사항과 실시 여부가 나타나 있는데, 전반적으로 現在가 되면 대부분이 열악해지고 위축된다. 경주향교가 경상도 내 비교적 안정된 향교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추세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다른 지역의 향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