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경주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전답을 조사하여 3일 이내로 보고하라고 경주군에서 경주향교로 내린 帖諭
내용 및 특징
慶州鄕校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各公文編纂綴」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된 고문서(23건) 중의 하나이다. 이 문서는 경주군의 제139호 첩유로 향교가 보유한 전답조사건과 관련된 내용이다. 일찍이 재무서에는 각군에 있는 향교의 재산을 근대식 공사립학교의 재용으로 충당하는 내용으로 각도 각군에 令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경주군에서도 경주향교에 첩유를 내려, 경주향교가 보유하고 있던 전답을 조사케 했었다. 1909년 3월 5일에 경주군에서는 제129호 첩유를 경주향교로 내려 이와 같이 경주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전답을 조사해서 경주군으로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본 1909년 5월 21일자 경주군의 제139호 첩유에 의하면, 경주향교에서 경주군의 令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듯하다. 두 달이 지나도록 전답조사 보고를 하지 않은 경주향교에 신속히 조사해서 보고 할 것을 독촉하는 내용으로 비협조적이었던 경주향교의 대응을 보여준다. 기일을 지키지 않음으로 일제의 향교정책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하던 경주향교에 대하여, 경주군에서는 3일 내로 신속히 경주향교 보유 전답을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독촉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의 향교 정책에 대한 일선 향교의 대응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향교의 재정 운영을 압박하고, 근대식 학교의 재용 충당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향교의 전답을 조사하고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나타나듯이 경주향교는 일제의 令을 지연시키는 소극적 저항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저항 양상은 다른 고을의 향교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