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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궐리사(闕里祠) 통첩(通牒)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XF.1915.4423-20090831.Y091010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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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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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동석, 김용집, 이내수, 궐리사, 경주향교
작성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작성시기 1915
형태사항 크기: 20 X 29
수량: 1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문중소개

관련자료

안내정보

1915년 궐리사(闕里祠) 통첩(通牒)
일제는 한말(韓末)부터 각 고을 소재 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 운영에 간여함으로써 향교의 운영을 통제해 왔다. 1910년에는 학부(學部) 훈령(訓令)을 통해 향교 재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법으로 제정하였고, 각 고을의 향교 운영은 조선시대에 비해 크게 위축되어 갔다. 이에 1915년 지금의 충청남도궐리사(闕里祠)에서 향교의 부흥을 위해, 각 고을 유림들이 해당 고을 소재 향교 운영을 위한 자금을 각기 모금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을 본 문서와 같이 만들어 경주향교(慶州鄕校)를 비롯한 전국의 향교에 발송하였었다.
이광우

상세정보

1915년 4월 충남논산궐리사에서 경주향교로 보낸 통첩으로, 향교 운영 자금을 해당 고을의 유림들이 출자하여 마련하자는 내용
내용 및 특징
慶州鄕校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各公文編纂綴」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된 고문서(23건) 중의 하나이다. 이 문서는 1915忠淸南道論山郡魯城面에 소재한 闕里祠에서 충청도 유림 李東奭 외 36명이 발기하여 경주향교直員 앞으로 보낸 통첩이다. 통첩의 주 내용은 향교 운영에 필요한 부족한 자금을 해당 고을 유림들 스스로 出資하여 마련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통첩이 발급된 1915년은 각 지방의 향교 운영에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던 시기였다. 일제는 1910년 4월 28일 學部 訓令 제2호에 따라 향교 재산은 해당 지방관의 지휘와 감독 하에 집행하게 했고, 이어 향교의 전답을 국유지가 아닌 것으로 판단을 내려 각 향교에 課稅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운영하는데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토지에 과세가 부과되어 여러 모로 독자적인 운영에 어려움이 나타났다. 그래서 향교 건물이 頹落하고 顚覆 되어도 修葺 및 改築하지 못하며 향교는 퇴락해 갔다. 이에 충청남도논산에 위치한 대표적인 祠宇인 궐리사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향교 운영 자금 마련을 권유하는 통첩을 작성하여 京城府에서 인쇄하여 각 향교에 발급하게 된 것이다.
통첩에 따르면, 유교는 正學으로 孔子朱子가 없었으면 우리는 禽獸나 오랑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들을 追崇해 왔고, 우리나라도 고려조 때 安珦이 諸賢과 더불어 공자주자의 眞像을 太學과 각 향읍의 校宮에 모시고 尊仰하며, 경각이라도 그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래 재정적 궁핍으로 향교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니, 이는 곧 어버이를 존경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유림들이 논의를 하여 퇴락한 殿宇와 齋宮을 수리할 비용을 出資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시대 유림들의 향교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 문서가 작성된 1915년은 일제의 향교 통제 정책에 의해 여러모로 향교 운영이 점점 궁핍해져가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유림들은 향교 부흥을 위한 방책을 강구해 나가게 되는데, 이 문서는 전국의 유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대응해 나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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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15년 궐리사(闕里祠) 통첩(通牒)
通牒
右牒爲通告事竊伏惟我儒敎卽體天地之大道通古今之正學前乎夫子
刱而演之後乎夫子紹而述之然而徵夫子
無以繼往聖開來學而覆載間含血茹毛之倫竟不免夷狄禽獸之歸矣嗟夫時之旣往
惟億千萬年時之未來亦億千萬年而惟吾夫子一人於中間以中間一人之夫子
爲吾人之一太極而皆從其敎者是吾儒當今之急先務也東方箕聖以來尊信儒
術非不至矣逮夫麗朝晦軒安先生與當時諸賢彰明之正脉虔奉之眞
像國都而建太學鄕邑而設校宮使人人知有而尊仰之篤信之擩染於耳目
浹洽於骨髓而不可頃刻忘于懷者也鳴呼世遠三五運値百六大道衰矣斯文喪矣朱
紫相混薰蕕莫辨晦軒詩所謂香燈祈佛簫管養神之句實目下現狀而數間廟寂無人
之語爲今日准備也思之心寒言之胸窴第以各地校宮事言之今雖自政界管理而
其頹落者修葺之顚覆者改築之則亦不無吾人肩擔底義務何者西銘不云乎民吾同
胞物吾與也大君者吾父母宗子其大臣宗子之家相也以吾儒所處則視夫子如天
地父母而其尊護之道崇奉之節若宗子家相設或有不遑處吾儒同胞曷敢岸視而袖
手乎至若此一段關係君臣上下官民大小同一其崇報之義則有智者發謀有資者出
力殿宇齋堂隨頹隨葺詩書禮樂隨時隨講使聖人之道煥然復明於世則凡有血氣
者孰不尊親而樂赴之哉伏願儒心儒行之僉君子各其注意各其效誠各其所在
校宮爛商恊議俾圖保存之地天萬幸甚
孔子誕降二千四百六十六年乙卯四月日
發起人
李東奭金容執尹憲炳洪祐純李炳善尹相翊趙天楨李侙尹炳日尹轍炳鄭寅範金宗洙呂貞東
金一濟尹忠夏金善浩李來修趙元善金馨培林承周安相喆金佐鎭李建七李壎洪鍾起
尹滋昌林炳瀚尹相耆金永燾金丙赫韓昌敎李洪來李世鎭朴政柱地昌永尹相勗李敎承
慶州郡鄕校直員座下
發起所【京城府禮府洞百十八番地
忠南論山郡魯城面闕里祠

此亦中若或踵舊習挾私心自有官法儒罰到底謹愼申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