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4월 충남논산의 궐리사에서 경주향교로 보낸 통첩으로, 향교 운영 자금을 해당 고을의 유림들이 출자하여 마련하자는 내용
내용 및 특징
慶州鄕校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各公文編纂綴」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된 고문서(23건) 중의 하나이다. 이 문서는 1915년 忠淸南道論山郡魯城面에 소재한 闕里祠에서 충청도 유림 李東奭 외 36명이 발기하여 경주향교의 直員 앞으로 보낸 통첩이다. 통첩의 주 내용은 향교 운영에 필요한 부족한 자금을 해당 고을 유림들 스스로 出資하여 마련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통첩이 발급된 1915년은 각 지방의 향교 운영에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던 시기였다. 일제는 1910년 4월 28일 學部 訓令 제2호에 따라 향교 재산은 해당 지방관의 지휘와 감독 하에 집행하게 했고, 이어 향교의 전답을 국유지가 아닌 것으로 판단을 내려 각 향교에 課稅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운영하는데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토지에 과세가 부과되어 여러 모로 독자적인 운영에 어려움이 나타났다. 그래서 향교 건물이 頹落하고 顚覆 되어도 修葺 및 改築하지 못하며 향교는 퇴락해 갔다. 이에 충청남도논산에 위치한 대표적인 祠宇인 궐리사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향교 운영 자금 마련을 권유하는 통첩을 작성하여 京城府에서 인쇄하여 각 향교에 발급하게 된 것이다.
통첩에 따르면, 유교는 正學으로 孔子와 朱子가 없었으면 우리는 禽獸나 오랑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들을 追崇해 왔고, 우리나라도 고려조 때 安珦이 諸賢과 더불어 공자와 주자의 眞像을 太學과 각 향읍의 校宮에 모시고 尊仰하며, 경각이라도 그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래 재정적 궁핍으로 향교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니, 이는 곧 어버이를 존경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유림들이 논의를 하여 퇴락한 殿宇와 齋宮을 수리할 비용을 出資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시대 유림들의 향교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 문서가 작성된 1915년은 일제의 향교 통제 정책에 의해 여러모로 향교 운영이 점점 궁핍해져가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유림들은 향교 부흥을 위한 방책을 강구해 나가게 되는데, 이 문서는 전국의 유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대응해 나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