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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경주 양좌동(良佐洞) 향약안(香約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WZ.1782.4713-20090831.Y094060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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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782
형태사항 크기: 34 X 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1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1782년 경주 양좌동(良佐洞) 향약안(香約案)
길흉사(吉凶事) 발생시 계원 상호 간 부조(扶助)를 위한 목적으로 경주양좌동(良佐洞)에서 결성되었던, 동계(洞契)의 계원 명부로 1782년에 작성되었다. 본 자료를 통해 18세기 후반 동계에 참여하고 있었던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본 자료에는 이전까지 양좌동에서 작성된 향약안과는 달리, 동계 운영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결의한 입의(立議)나 완의(完議)는 함께 수록하고 있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동계 운영의 실태를 확인 할 수는 없다. 다만, 명단 기재에 있어 별도로 상인(上人)과 하인(下人)을 구별하지 않은 점, 경주손씨와 여강이씨를 제외한 다른 성(姓)의 사람들이 계원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결국 18세기 후반 양좌동의 향약(香約)이 더 이상 양좌동과 그 인근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배규범의 권위를 갖지 못하고, 일족의 참여하는 족계(族契) 수준으로 위축되어 운영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해준다.
이광우

상세정보

1782년 吉凶事 발생시 상호 扶助를 목적으로 경주良佐洞에서 실시되고 있던 洞約의 約員 명부
壬寅正月日 香約案
左洞, 右洞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주부의 屬縣이었던 安康良佐洞에서 실시된 香約의 約員 명부이다. 良佐洞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班村으로 慶州孫氏와 驪江李氏 두 가문이 집성촌을 이루고 오랫동안 세거해 오고 있는 마을이다. 香約案은 일종의 洞契案으로 契員의 명부와 契員의 직계와 尊卑屬 및 기타 정하는 가족의 喪葬시 상호 부조가 규정되어 있다. 모두 12책으로 시기 순으로 己巳(1689), 丁丑(1697), 戊子(1708), 辛卯(1711), 癸卯(1723), 戊申(1728), 癸丑(1733), 己未(1739), 庚午(1750), 壬申(1752), 甲申(1764), 壬寅(1782)의 香約案이 전해진다. 香約案의 구성과 목차는 마을 중간의 개천을 경계로 左洞과 右洞으로 나누어 우선 명단을 기재해 놓고, 마을 운영과 실상에 대해 나타나는 立議나 完議 등을 수록하는 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782년 壬寅 정월에 작성된 본 香約案에는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香約案과는 달리 契員의 명단만 기재되어 있고, 立議나 完議는 첨부해 놓지 않았다. 壬寅年(1782) 정월에 작성된 香約案에는 모두 54명(追入 14명)의 契員 명단이 출생 干支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孫씨 21명(追入 8명), 李씨 33명(追入 6명)이다. 지역별로는 左洞이 17명(追入 2명)으로 孫씨 2명, 李씨 15명(追入 2명)이며, 右洞이 37명(追入 12명)으로 孫씨 19명(追入 8명), 李씨 18명(追入 4명)이다. 계원 중 右洞의 孫星洛孫星東이 庚戌年(1790)에 각각 上有司와 公事員으로 임명되었다고 나타난다.
본 壬寅年 香約案은 庚午(1750)와 壬申(1752)의 香約案과 더불어 모두 계원 명단만 기재되어 있어, 立議나 完議를 첨부한 다른 香約案처럼 香約의 구체적인 운영 양상을 살펴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명단의 기재에서 나타나는 양식과 이전 己巳(1689), 丁丑(1697), 戊子(1708), 辛卯(1711), 癸卯(1723), 戊申(1728), 癸丑(1733), 己未(1739)의 香案을 비교함으로써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기재 양식에서 上人과 下人을 이전처럼 별도의 단을 구분해서 기재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된다. 기재 양식의 변화에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18세기 이후 사족을 제외한 중간,하층민의 성장이 반영되어, 동일 선상에서 명단이 기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己未年(1739) 香約案부터 수록자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으로 한정되고 있는데, 한 고을을 구성하고 있던 타성까지 아우르던 동계에서 두 가문만을 포함하는 족계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782良佐洞 香約案은 조선후기 영남 각지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族契,洞契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16~17세기를 거치면서 향촌지배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한 재지사족은 鄕案 및 鄕規를 점차 제정해 나가며, 향촌 내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결과 壬亂 이후에는 사족들뿐만 아니라 하층민들까지 포함시키는 동계를 결성하기 시작하는데, 본 香約도 그러한 과정과 맞물려서 결성 되었다. 그리고 香約에 하층민을 포함시켜 함께 扶助의 혜택을 받게 하여, 사족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하층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지속적인 향촌 내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변동은 신분지배 질서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士族이 중심이 되어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결성한 洞契의 운영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세는 경주양좌동에서 조직되었던 香約에서도 나타난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하층민을 아울렀던 양좌동 향약과는 별도로 하층민들만의 香徒契가 조직되면서, 하층민의 香約에서의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향약을 주도하던 사족들은 동계에 가담하지 않은 하층민들에게 赴役을 전가시켜 여러 불이익을 주는 등의 통제 책을 쓰거나, 재용을 절감하는 규정을 제정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으나, 하층민의 이탈을 막지 못하였다.
壬寅年 香約案을 통해서는 18세기 후반 하층민의 저항과 이탈로 위축된 동계 운영의 일면목을 유추 할 수가 있다. 비록 명단 밖에 없으나, 명단 기재에 있어 별도로 上下人을 구별하지 않은 것, 경주손씨와 여강이씨를 제외한 他姓이 입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결국 양좌동의 香約이 더 이상 향촌 지배규범의 권위를 갖지 못하고, 족계 수준으로 위축된 채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良佐洞硏究』, 「良洞의 歷史的 考察」,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0
『民族文化論叢』第15輯, 「朝鮮後期 慶州地域 在地士族의 鄕村支配」,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94
『新羅文化』第20輯, 「慶州鄕案의 성립과 그 운영」, 崔孝軾,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2002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82년 경주 양좌동(良佐洞) 향약안(香約案)
香約案
左洞
■■■(李光中)【壬午

■■■(李憲濂)【己丑

李憲鐸甲午

■■■(李憲黙)【甲午

李憲稷戊戌

李憲履辛丑

■■■(孫象九)【癸卯

李憲紘戊申

李鼎臣丁巳

孫星翼庚申

李鼎受辛酉

李鼎猷庚申

李鼎台壬申

李鼎宏甲戌

李鼎石
追入
李鼎莘丙辰

追入
李憲純甲寅

右洞
■■■(孫能杰)【癸巳

■■■(孫玄九)【庚子

李憲光辛丑

李鼎燮辛丑

■■■(孫龍九)【甲辰

■■■(李憲烈)【甲辰

孫升九【願出

■■■(李鼎宅)【甲辰

■■■(李鼎梅)【乙巳

■■■(李憲奭)【丁未

■■■(孫雲九)【戊申

孫星精丙午

■■■(李鼎爀)【己酉

■■■(孫應龜)【辛亥

■■■(李鼎宇)【辛亥

孫鼎九辛亥

■■■(李鼎勳)【甲寅

李鼎揆乙卯

孫星東庚戌公事員

李鼎凝癸亥

孫星德甲子

孫亨九庚午

李憲教己巳

李鼎慶甲戌

李元祥壬午

追入
孫弘九癸亥

追入
李憲白癸丑

李鼎任癸酉

追入
孫烈九丁卯

李國祥壬申

孫星樸壬午

孫鍾榦
孫星發
追入
孫星洛庚戌上有司

孫星冀丙子

李鼎基己卯

孫星建乙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