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주부의 屬縣이었던 安康良佐洞에서 실시된 香約의 約員 명부이다. 良佐洞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班村으로 慶州孫氏와 驪江李氏 두 가문이 집성촌을 이루고 오랫동안 세거해 오고 있는 마을이다. 香約案은 일종의 洞契案으로 契員의 명부와 契員의 직계와 尊卑屬 및 기타 정하는 가족의 喪葬시 상호 부조가 규정되어 있다. 모두 12책으로 시기 순으로 己巳(1689), 丁丑(1697), 戊子(1708), 辛卯(1711), 癸卯(1723), 戊申(1728), 癸丑(1733), 己未(1739), 庚午(1750), 壬申(1752), 甲申(1764), 壬寅(1782)의 香約案이 전해진다. 香約案의 구성과 목차는 마을 중간의 개천을 경계로 左洞과 右洞으로 나누어 우선 명단을 기재해 놓고, 마을 운영과 실상에 대해 나타나는 立議나 完議 등을 수록하는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香約案은 1733년 癸丑 정월에 작성된 것으로 본문은 左洞과 右洞의 契員 명단, 立議, 癸丑 追完議, 追完議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癸丑年(1728)에 작성된 香約案에는 모두 75명(追入 8명)의 契員이 출생 干支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孫씨 34명, 李씨 38명(追入 7명), 鄭씨 1명, 金씨 2명(追入 1명)이다. 지역별로는 左洞이 42명(追入 6명)으로 孫씨 17명, 李씨 22명(追入 5명), 鄭씨 1명, 金씨 2명(追入 1명)이며, 右洞이 33명(追入 2명)으로 孫씨 17명, 李씨 16명(追入 2명)이다. 신분별로는 上人이 60명(追入 7명)이고, 下人이 15명(追入 1명)이다. 上人은 左洞이 30명(追入 5명)으로 孫씨 8명, 李씨 22명(追入 5명)이며, 右洞이 30명으로 孫씨 15명, 李씨 15명(追入 2명)이다. 下人은 左洞이 15명(追入 1명)으로 孫씨 9명, 鄭씨 1명, 金씨 2명이며, 右洞은 3명으로 孫씨 2명, 鄭씨 1명이다. 上人 중에는 右洞 孫命祿이 乙卯年(1735)에, 左洞 李能中이 戊午年(1738)에 上有司에 임명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명단 다음에는 香約의 立議 22개조가 대략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우리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香約을 遵行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饑饉과 疾疫으로 上,下人의 喪敗가 연달아 일어나 約規가 점차 頹廢해 지는 지경에 이르러 成樣하는 길이 萬無한 상황이다. 이에 모여 회의를 해서, 上下 모두 契員의 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一洞의 사람들을 渾入하는 것으로 영구히 준수하기로 한다. 立議한 條例는 다음과 같다.一. 上下를 勿論하고 만약 水火나 盜賊의 患을 당하면, 盖草 4把, 蒿索 10把, 柱 1介, 椽 1介, 米 2升 式으로 應給할 것. 一. 約員에게 비록 형제가 많더라도 役軍 1員을 例給할 것. 一. 約員이 혹 軍丁을 役하지 않고 스스로 米 1升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許給할 것. 一. 下人이 父母,妻子의 喪을 당하면, 左,右洞을 勿論하고 각기 白米 2升을 보태어 주데, 上任次知가 收給 할 것. 一. 이미 대소의 喪葬에는 例에 따라 相資의 규정이 마련되어 있으니, 下人私契에 대해서는 客喪을 擔持하는 것 외에 전과 같이 侵督해서 紛紜의 폐단을 일으키지 않을 것. 一. 約中은 初喪 成殯때 盖草 4把, 蒿索 10把, 柱 1介, 椳木 1丹을 下人이면, 椽木 1介 式으로 수합하여 助殯하는 재용으로 삼는다. 上中 許給은 勿許 할 것. 一. 造墓의 擔持는 左,右洞 반으로 나누어 輪役하며, 役을 마친 후의 양식은 스스로 마련하나, 埋葬 때의 점심은 主家가 饋酒하는 것을 三巡 할 것. 一. 上契가 過夜할 때에는 上中下를 勿論하고 酒 5升, 米 1升 式으로 收給할 것. 一. 役軍의 出闕은 극히 未安한 일이니, 이후로는 절대로 出闕하지 말고 혹 出闕을 한다면, 役價를 마땅히 備給하오되, 3차례 踵門해도 備給하지 않는 자는 約任이 그 奴를 捉致하여 笞 20度를 때린 후 다시 거둘 것. 一. 香約 田畓의 所出과 役價는 다만 喪葬 때, 器具를 마련하는데 쓰고, 절대로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 一. 約中의 喪輿와 香亭子는 契員에게 應給하는 것 이외에는 一切 勿許하며, 만약 合用하는 員이 있으면 錢文 1兩을 準納한 후에 許給 할 것. 一. 約員의 父母妻長子婦의 初喪 때에는 草席 4立, 油紙 3丈을 備給할 것. 一. 約中의 錁鍤屛風 등의 물건은 契員 외에 一切 勿許하며, 約員의 喪葬 外 다른 곳에 쓰는 것을 不得 할 것. 一 傳受 錢文은 遆任 때, 酒肴價로 절대 내어 쓰지 말 것. 一. 근래에 香約의 立規가 해마다 해이해져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常漢으로 빠지기를 원하는 자는 연이었는데,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는 전혀 없게 되었다.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반드시 成樣의 勢가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해 僉會하여 다시 立規를 세워 保存하는 방도로 삼을 것. 一. 約外員의 喪葬 때에는 으레 香徒로 하여금 赴役케 하나, 約軍이 混同되어 疊役하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할 것. 一. 約內外를 勿論하고 香徒軍丁에게 一巡으로 赴役시킬 것. 一. 箭竹을 베어 들이는 것과 鰱魚를 運納할 때에는 香約軍丁이 절대 맡게 하지 말고, 香徒가 담당하게 할 것. 一. 客喪을 擔持 할 때에는 절대로 許給하지 말고, 香徒로 하여금 담당하게 할 것. 一. 造殯은 闕軍들로 하여금 사무를 보고 座主가 督促하는데, 役이 끝날 때까지 끝내 赴役하지 않는 자들은 매명 闕錢 1錢式으로 거두어 喪家에서 補用케 할 것. 一. 初喪所에 空石을 주는 것이 不均한 弊가 있으니, 이후로 約內外를 勿論하고 洞內에서 吐汗 收用 할 것.
이어 丙午(1726) 2월 19일에 追錄된 立議 2개 조항이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一. 下人이 遭上한다면, 約中 1石 式으로 上下 할 것. 이어 癸丑 정월 香約案이 작성 될 때, 추록된 完議 6개 조항이 대략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一. 傳與時 錢文 3냥 式으로 油紙 20丈, 草席 10立 式으로 留上하여 비치하고, 紙와 席이 年內에 만약 부족함이 없으면, 3냥을 留上하여 절대 타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新任에게 傳授할 것. 一. 打作租로 下契에 例給하는 것 외에는 約中 什物이 훼손될 때 修備하는데 쓰고, 남은 穀은 本租로써 新任에게 傳與하여, 作錢한 뒤 取殖해서 買土하는데 쓸 것. 一. 役軍의 徵闕은 예전부터 있었던 규정이나 근래 出闕하는 家가 전혀 備給되지 않았으며, 任司 또한 不勤하니 하나도 收捧되는 것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지경으로 設約의 本意가 아니다. 지금 이후로 三巡 不給하면 笞奴 20度하고, 五巡 不給이면 約案에서 삭출한다. 一. 任司는 笞奴한 후에 被告의 집에서 만약 起閙의 사단이 있으면, 齊會하여 의견을 모은 다음 削案 할 것. 一.遆任 때 打作租는 절대로 酒肴와 辦供에 쓰지 말고, 다만 徵闕한 物로써 辦行 할 것. 一. 香約의 畓의 卜數는 每卜 代斗함이 심하니 옳지 않다. 이후로 그 해의 豊凶을 쫒아 通議하여 約中에서 임시로 짐작해, 濫給함에 이르지 않을 것.
다음에는 癸丑年 이후에 추가 기재 된 것으로 여겨지는 完議 6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一. 香約 重設 후에 喪布를 例給하는 規가 없으니, 缺事가 된다. 지금 이후로 始喪에 미리 措備하여 臨時로 顧助 할 것. 一. 契畓穀은 結卜價 외에 절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매년 貿布가 많고 적음에 따라 藏置해서 初喪의 비용에 대비하고 遆任 때 酒饌 등의 비용은 힘써 간략하게 하고 절대로 남용하지 말 것. 一. 約中 喪出한 후에 任司가 가서 보고 30尺 式으로 主家에 例給 할 것. 一. 喪布는 貿置한 후에 約 內外를 勿論하고 혹 殖納하는 일을 請貸하는 자가 있으면, 절대 들어주지 말고 續納 할 것. 一. 常漢도 일찍이 같은 洞契의 사람이니, 顧恤이 없는 것은 불가하다. 喪을 당하는 자가 있으면 喪布 15尺의 式으로 例給 할 것. 一. 約中 器械 등의 물건이 喪葬 때에 혹 파손되는 일이 있으면, 鐵物의 경우 主家에서 備納하고, 木物은 約中 스스로 新備하나, 삼가지 않은 과실이 있으면 主家가 專當하여 備納 할 것.
이상 癸丑 正月의 香約案은 契員의 명단을 기재하고, 吉凶시 扶助와 관련된 내용의 約條를 수록해 놓은 것으로, 이 동계가 吉凶에 扶助함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음을 보여준다. 본 洞契의 契員은 上人과 下人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인은 양좌동에 세거하고 있던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의 사족이며, 하인은 常漢이라 일컬어지는 서얼이하의 하층민이다. 香約의 約任으로는 上有司와 下有司가 확인된다. 上有司는 上人 즉, 사족 가운데 선출되었으며, 下有司는 下人 즉, 하층민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契員의 수는 초창기 양좌동 다른 香案과 같이 50명으로 제한을 두고 있지 않고 있는데, 이는 잦은 기근과 疾疫으로 계원이 많이 줄어든 까닭에 員數에 제한을 두지 않고 入契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契員의 수를 살펴보았을 때, 下人의 경우 李씨가 孫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양좌동에 嫡庶가 함께 세거하는 비율이 孫씨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반면 李씨의 경우 일찍이 주요 庶派가 양좌동에서 갈려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下人의 수가 적은 것이다.
香約案 뒷부분에 기재된 立議는 己巳年(1689)에서부터 戊申(1728)까지 규정된 立議와 追錄된 立議를 종합하여 기재하고 있다. 입의의 내용은 초창기 규정 된 입의와 많은 차이가 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契員의 부족으로 上下를 구별하지 않고 員數에 제한을 두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香約이 향촌 내 통제력 하락을 반증하기도 한다. 아울러 입의에는 下契 즉, 香約 조직과는 별도로 하층민이 결성한 香徒契 조직의 운영에 대한 대응 내용이 주목된다. 입의에 나타난 주된 대응의 방법은 洞에서 펼쳐지는 각종 赴役을 하계에 가담하고 있는 하층민에게 전가를 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하층민이 下契로 이탈함에 따라 香約의 운영이 위축되자 扶助의 양을 除減하는 등의 대응이 주로 나타난다. 이어 기재된 癸丑 正月에 추록된 完議와 癸丑 正月 이후에 추록된 것으로 보이는 完議에도, 주로 香約 재용의 절감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당시 위축된 동계 운영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료적 가치
1733년 良佐洞 香約案은 조선후기 영남 각지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族契와 洞契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16~17세기를 거치면서 향촌지배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한 재지사족은 鄕案 및 鄕規를 점차 제정해 나가며, 향촌 내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결과 壬亂 이후에는 사족들뿐만 아니라 하층민들까지 포함시키는 동계를 결성하기 시작하는데, 본 香約도 그러한 과정과 맞물려서 결성 되었다. 그리고 香約에 하층민을 포함시켜 함께 扶助의 혜택을 받게 하여, 사족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하층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지속적인 향촌 내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변동은 신분지배 질서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士族이 중심이 되어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결성한 洞契의 운영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본 癸丑 香約案에서도 그러한 洞契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향안의 뒷부분에 기재되어 있는 입의와 추록 입의는 하층민이 별도로 香徒契를 결성하고, 동계에서 이탈함에 따라 사족 지배체제 중심으로 운영되어 오던 동계인 香約이 위축되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동계에 가담하지 않은 하층민들에게 赴役을 전가시켜 여러 불이익을 주는 등의 통제 책을 쓰거나, 재용을 절감하여 위축된 동계의 재정상황에 대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