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4년 吉凶事 발생시 상호 扶助를 목적으로 경주良佐洞에서 실시되고 있던 洞約의 約員 명부
甲申正月日 香約案
左洞, 右洞, 丁亥正月二十日 立議, 戊子正月二十二日 立議, 丙戌二月十六日 立議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주부의 屬縣이었던 安康良佐洞에서 실시된 香約의 約員 명부이다. 良佐洞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班村으로 慶州孫氏와 驪江李氏 두 가문이 집성촌을 이루고 오랫동안 세거해 오고 있는 마을이다. 香約案은 일종의 洞契案으로 契員의 명부와 契員의 직계와 尊卑屬 및 기타 정하는 가족의 喪葬시 상호 부조가 규정되어 있다. 모두 12책으로 시기 순으로 己巳(1689), 丁丑(1697), 戊子(1708), 辛卯(1711), 癸卯(1723), 戊申(1728), 癸丑(1733), 己未(1739), 庚午(1750), 壬申(1752), 甲申(1764), 壬寅(1782)의 香約案이 전해진다. 香約案의 구성과 목차는 마을 중간의 개천을 경계로 左洞과 右洞으로 나누어 우선 명단을 기재해 놓고, 마을 운영과 실상에 대해 나타나는 立議나 完議 등을 수록하는 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764년 甲申 정월에 작성된 본 香約案은 香約案 契員 명단, 丁亥(1767) 정월 20일 立議, 戊子(1768) 정월 22일 立議, 丙戌(1766) 2월 16일 立議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甲申年(1764) 정월에 작성된 香約案에는 모두 58명(追入 16명)의 契員 명단이 출생 干支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孫씨 20명(追入 4명), 李씨 38명(追入 12명)이다. 지역별로는 左洞이 27명(追入 9명)으로 孫씨 5명, 李씨 22명(追入 9명)이며, 右洞이 31명(追入 7)으로 孫씨 15명(追入 4명), 李씨 16명(追入 3명)이다. 계원들 중에는 右洞 李鼎梅가 乙酉(1765)에, 右洞 李憲履가 戊子(1768)에, 左洞 李憲紘이 壬辰(1772)에, 좌동 李憲奭이 甲午(1774)에, 左洞 李憲斌이 乙未(1775)에 上有司 임명되었다. 그리고 右洞 孫復九가 丙戌(1766)에, 右洞 李憲烈이 己丑(1769)에, 右洞 李鼎揆가 癸巳(1773)에 각각 有司로 임명되었으며, 左洞 李憲徵이 甲申(1764)에, 右洞 孫能杰이 乙酉(1765)에, 左洞 李憲鐸이 丙戌(1766)에, 左洞 李憲黙이 丁亥(1767)에, 左洞 李憲魯가 戊子(1768)에, 右洞 孫玄九가 己丑(1769)에, 右洞 李憲燾가 癸巳(1773)에, 左洞 李憲夔가 甲午(1774)에, 左洞 孫象九가 乙未(1775)에 각각 公事員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기재된 丁亥(1767), 戊子(1768), 丙戌(1766) 순으로 입의가 기재되어 있다.
연도 순으로 살펴보면, 먼저 丙戌(1766) 立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乙丙年 이래 約中의 喪葬이 許多하여 物力이 凋殘해져 數에 맞추어 출급하는 것이 어려워진 까닭에 己卯年(1759) 約會 때 上下 例給하는 것을 酌定하여 減數하였는데, 지금 下契가 零殘함을 빌려 使喚 등의 일이 難堪하다 하니, 이제 下弊로 約會를 열어 例給하는 布를 前給하던 租에 의거해 5斗를 더함으로써 1石을 出給하는 것으로 영구히 定式으로 삼을 것. 丁亥(1767) 立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己卯年(1759)의 立議에서는 1755년과 1756년 큰 흉년을 맞은 후, 契中 物力이 凋弊해져 從前 例給하던 穀布를 줄이는 것으로 定하였다. 근래 연달아 풍년이 들어 물력이 이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다. 이에 上契에 例給하는 포는 前과 같이 20尺으로 準給하고, 下契의 穀은 15斗로 例給하며 布는 前例에 의거하여 15尺으로 準給 할 것. 이어 戊子(1768) 立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約中 喪輿와 여러 什物은 約外가 이를 사용하는 것을 勿論하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것이 乖敗해졌으니, 이는 先父老가 立法한 뜻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 喪輿와 遮日, 鐵物 등의 물건을 約外 人員에게 許給하는 것은 物許하는 일로 立議 함. 이상 甲申 香約案 역시, 己未(1739) 이후의 香約案처럼 계원으로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만 기재되어 있다. 한 고을을 구성하고 있던 타성까지 아우르며, 향촌을 통제하던 동계에서 두 가문만을 포함하는 족계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명단 기재 방식에 있어서도 庚午年(1750) 香約案 이후의 것처럼 上人과 下人을 단을 나누어 구별해 기재해 놓지 않고 있다. 약임을 살펴보았을 때, 上有司와 有司, 公事員이 확인되며, 이전에 있었던 下有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명단 뒤에는 1765년, 1766년, 1768년에 추가 제정 된 立議가 수록되어 있다. 約契의 재용 절감과 관련된 내용이 확인된다.
자료적 가치
1764년 良佐洞 香約案은 조선후기 영남 각지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族契,洞契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16~17세기를 거치면서 향촌지배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한 재지사족은 鄕案 및 鄕規를 점차 제정해 나가며, 향촌 내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결과 壬亂 이후에는 사족들뿐만 아니라 하층민들까지 포함시키는 동계를 결성하기 시작하는데, 본 香約도 그러한 과정과 맞물려서 결성 되었다. 그리고 香約에 하층민을 포함시켜 함께 扶助의 혜택을 받게 하여, 사족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하층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지속적인 향촌 내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변동은 신분지배 질서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士族이 중심이 되어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결성한 洞契의 운영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세는 경주양좌동에서 조직되었던 香約에서도 나타난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하층민을 아울렀던 양좌동 향약과는 별도로 하층민들만의 下契가 조직되면서, 하층민의 香約에서의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향약을 주도하던 사족들은 동계에 가담하지 않은 하층민들에게 赴役을 전가시켜 여러 불이익을 주는 등의 통제 책을 쓰거나, 재용을 절감하는 규정을 제정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으나, 하층민의 이탈을 막지 못하였다.
본 甲申年 香約案을 통해서는 18세기 중반 하층민의 저항과 이탈로 위축된 동계 운영의 일면목을 유추 할 수가 있다. 명단 기재에 있어 별도로 上下人을 구별하지 않은 것, 경주손씨와 여강이씨를 제외한 他姓이 입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결국 양좌동의 香約이 더 이상 향촌 지배규범의 권위를 갖지 못하고, 족계 수준으로 위축된 채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良佐洞硏究』, 「良洞의 歷史的 考察」,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0
『民族文化論叢』第15輯, 「朝鮮後期 慶州地域 在地士族의 鄕村支配」,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94
『新羅文化』第20輯, 「慶州鄕案의 성립과 그 운영」, 崔孝軾,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2002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