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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61년 「신유정월중수일록(辛酉正月重修日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861.4721-20180630.Y182190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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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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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백고리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작성시기 1861
형태사항 크기: 24.5 X 25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61년 「신유정월중수일록(辛酉正月重修日錄)」
1861년(철종 12)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소재 백고리사(白皐里社)의 중수(重修) 일록(日錄)이다. 이 일록은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신유정월중수일록(辛酉正月重修日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4책의 잡록이 전하는데, 다른 잡록과 달리 이것은 백고리사 측에서 기록한 것이다. 백고리사단곡(丹谷) 곽진(郭??)[1568~1633]과 사촌(沙村) 안덕린(安德麟)[15631609]을 제향(祭享)하기 위하여 1786년 12월 풍기군에 설립된 사우(祠宇)이다.
일록에는 1861년 1월 5일부터 시작하여 2월 7일까지 진행된 중수 공사의 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중수가 진행되는 동안 전답 매각과 기부 등을 통해 물력(物力)을 마련하고, 이를 재료 매입과 공가(工價)로 지불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어, 조선후기 사우의 재정 운영 실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61慶尙道 豊基郡白皐里社에서 진행한 重修 과정을 기록해 놓은 日錄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861년(철종 12) 1월 慶尙道 豊基郡白皐里社에서 시작한 重修 공사 과정을 기록해 놓은 日錄이다. 이 일록은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丹谷 郭??[1568~1633]과 沙村 安德麟[15631609]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록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월 초5일 歲謁 때 소속 工匠이 공사할 곳을 살펴보니, 廟宇로부터 奠舍·神門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리해야 된다고 해서, 工價 35냥을 정하였다. 무릇 수리의 논의는 여러 해 동안 있었으나, 事力이 미치지 못해 지금까지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썩어 허물어짐이 날로 심해져 지탱하기 어려워진 까닭에 작년 追享 때 의논을 모아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세 임원은 幹事를 나이에 구애하지 않고 薦望하였는데, 社長은 郭善慶, 別有司는 黃渭鱗, 齋任은 朴周一·李斗鎭이었다. 14일 낮에 사장·別任·재임이 합석하여 財力과 經紀 등의 일을 논의하였다. 이날 저녁 寒疾 때문에 사장이 집으로 돌아갔다. 19일 낮에 별임·재임이 와서 다음날 벌목과 재물을 모으는 일로 논의하였다. 저녁에 鉅刀匠 2명이 山城에서 내도하였고, 목수와 柳工이 寧田에서 내도하였다. 20일 향교 뒤편의 소나무 한 그루를 잘랐으니, 이는 향중이 논의하여 借得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부터 거도장이 공사를 시작하였다. 21일 上谷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잘라 왔는데, 이것은 首吏 李在民이 바친 것이다. 22일 사장의 병세가 악화되어, 묘시에 세상을 떠났다. 23일 椽木 12개를 梁周凡의 집에서 매입하였다. 24일 사장의 상례로 成服하였다. 社畓 3두락을 85냥에 팔았다. 25일 갑인, 堂會에서 사장을 새로 선출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未時에 위판을 강당으로 移安하였다. 이어 건물을 허물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식후에 忠州 鯉湖의 안씨 문중에 排錢 100냥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공사가 끝난 후 本孫有司가 40냥을 가지고 와서 납부하였다. 27일 柳工이 와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날부터 매일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향원이 번갈아 왔다. 28일 거도장이 일을 마치고 되돌아갔다.
2월 초1일 郁陽書院에서 다시 당회를 열어 사장 朴成欽, 都辦有司 黃渭麟·南基弘, 齋任 李斗鎭을 薦出하였다. 이두진은 단자를 올려 체직을 요구하여 柳道徽로 대신 薦望하였다. 이 날 浮橋木을 구하는 일로 郁錦洞의 洞?에서 소나무 두 그루, 黃秉敎가 기른 소나무 세 그루, 臥龍洞 松?에서 두 그루, 遁溪 東村의 李雅士가 기른 소나무 세 그루를 각각 베어 왔다. 초2일 재임 박주일이 出外한 뒤 돌아왔다. 이 날 묘우의 연목을 改修하였다. 이날부터 날마다 공사를 진행하여 초7일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지붕에 기와 덮는 것을 마쳤다. 전후 사용된 財用은 100여 금인데, 목공에게 37냥, 거도장에게 8냥, 철물가가 아울러 10냥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우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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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辛酉正月重修日錄
正月初五日歲謁時屬工匠看役處自廟宇
至奠舍神門皆須修葺定工價三十五兩大抵
修葺之論積年經紀而第以事力不逮遷就至
今矣今則朽壞日甚更難支吾故自歲前秋享
時僉議允合克定修理經?其時三任蓋以
幹事者不拘年齒薦望矣社長郭善慶
備有司黃渭鱗齋任朴周一李斗鎭▣自其
日得寒疾?歸其家
十四日午社長別任及齋任合席商論財力經
紀等事是日夕社長歸得寒疾委臥
十九日午別任齋任來會蓋以明日伐木鳩材事也
夕鉅刀匠二名自山城來木手柳工自寧田
二十日斫校後松木一株此則前已借得於鄕中僉論者也
自是日屬鉅刀始役

二十一日斫來上谷松一株此則首吏李在民所納
二十二日社長病革卯時屬?
二十三日買椽木十二箇於梁周凡
二十四日社長喪成服賣社畓三斗落八十五兩
二十五日甲寅設堂會蓋以是日出社長未時
移安于講堂仍又破屋始役事也食後發
送通文于忠州鯉湖安氏門中排餞壹百兩而
訖役後四十兩自本孫有司來納矣
二十七日柳工來始役自後逐日工役鄕員迭來
二十八日鉅刀工畢役而歸
二月初一日再設堂會于郁陽書院薦出社長
朴成欽都辦有司黃渭麟南基弘齋任李斗
單遞代望柳道徽是日浮橋木求伐而郁錦
?松二株黃秉敎養松三株臥龍洞松?二
遁溪東村李雅士養松三株斫來
初二日齋任朴周一出外而來是日改修廟宇椽木
自後日日董工赴役至初七日放工翌日蓋瓦旣畢

放瓦匠?前後財用百餘金木工三十七兩鉅刀
匠八兩鐵物?幷治價十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