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慶尙道 豊基郡의 白皐里社에서 진행한 重修 과정을 기록해 놓은 日錄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861년(철종 12) 1월 慶尙道 豊基郡의 白皐里社에서 시작한 重修 공사 과정을 기록해 놓은 日錄이다. 이 일록은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는 丹谷 郭??[1568~1633]과 沙村 安德麟[1563∼1609]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록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월 초5일 歲謁 때 소속 工匠이 공사할 곳을 살펴보니, 廟宇로부터 奠舍·神門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리해야 된다고 해서, 工價 35냥을 정하였다. 무릇 수리의 논의는 여러 해 동안 있었으나, 事力이 미치지 못해 지금까지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썩어 허물어짐이 날로 심해져 지탱하기 어려워진 까닭에 작년 追享 때 의논을 모아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세 임원은 幹事를 나이에 구애하지 않고 薦望하였는데, 社長은 郭善慶, 別有司는 黃渭鱗, 齋任은 朴周一·李斗鎭이었다. 14일 낮에 사장·別任·재임이 합석하여 財力과 經紀 등의 일을 논의하였다. 이날 저녁 寒疾 때문에 사장이 집으로 돌아갔다. 19일 낮에 별임·재임이 와서 다음날 벌목과 재물을 모으는 일로 논의하였다. 저녁에 鉅刀匠 2명이 山城에서 내도하였고, 목수와 柳工이 寧田에서 내도하였다. 20일 향교 뒤편의 소나무 한 그루를 잘랐으니, 이는 향중이 논의하여 借得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부터 거도장이 공사를 시작하였다. 21일 上谷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잘라 왔는데, 이것은 首吏 李在民이 바친 것이다. 22일 사장의 병세가 악화되어, 묘시에 세상을 떠났다. 23일 椽木 12개를 梁周凡의 집에서 매입하였다. 24일 사장의 상례로 成服하였다. 社畓 3두락을 85냥에 팔았다. 25일 갑인, 堂會에서 사장을 새로 선출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未時에 위판을 강당으로 移安하였다. 이어 건물을 허물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식후에 忠州 鯉湖의 안씨 문중에 排錢 100냥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공사가 끝난 후 本孫有司가 40냥을 가지고 와서 납부하였다. 27일 柳工이 와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날부터 매일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향원이 번갈아 왔다. 28일 거도장이 일을 마치고 되돌아갔다.
2월 초1일 郁陽書院에서 다시 당회를 열어 사장 朴成欽, 都辦有司 黃渭麟·南基弘, 齋任 李斗鎭을 薦出하였다. 이두진은 단자를 올려 체직을 요구하여 柳道徽로 대신 薦望하였다. 이 날 浮橋木을 구하는 일로 郁錦洞의 洞?에서 소나무 두 그루, 黃秉敎가 기른 소나무 세 그루, 臥龍洞 松?에서 두 그루, 遁溪 東村의 李雅士가 기른 소나무 세 그루를 각각 베어 왔다. 초2일 재임 박주일이 出外한 뒤 돌아왔다. 이 날 묘우의 연목을 改修하였다. 이날부터 날마다 공사를 진행하여 초7일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지붕에 기와 덮는 것을 마쳤다. 전후 사용된 財用은 100여 금인데, 목공에게 37냥, 거도장에게 8냥, 철물가가 아울러 10냥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우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