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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06년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806.4721-20180630.Y182190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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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백고리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작성시기 1806
형태사항 크기: 24.5 X 25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06년 기사
1806년(순조 6)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백고리사(白皐里社)의 강당(講堂) 건립 과정을 기록한 기사이다. 이 기사는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4책의 잡록이 전하는데, 다른 잡록과 달리 이것은 백고리사 측에서 기록한 것이다. 백고리사단곡(丹谷) 곽진(郭??)[1568~1633]과 사촌(沙村) 안덕린(安德麟)[15631609]을 제향(祭享)하기 위하여 1786년 12월에 설립된 사우(祠宇)이다.
1806년 기사에는 사우 건립 후 여러 해 동안 강당(講堂)이 없어서 사림들이 안타까워했는데, 제향자의 후손들이 물력을 제공하여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물력 부족으로 8월에 공사가 중지된 사실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공사 과정에서 작성된 황사원(黃泗源)의 개기축문(開基祝文)과 황용한(黃龍漢)의 상량문(上樑文)을 함께 수록해 놓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06慶尙道 豊基郡白皐里社에서 진행되었던 講堂 신축 관련 기사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806년(순조 6) 慶尙道 豊基郡에 소재했던 白皐里社의 講堂 공사 관련 기사로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丹谷 郭??[1568~1633]과 沙村 安德麟[15631609]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806년의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1806년 정월 초4일 풍기군 소재 郁陽書院의 歲謁 堂會 때 여러 사람이 백고리사가 설립되고 여러 해가 지났으나 아직 강당이 마련되지 않은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강당이 없어 尊奉하는 곳에 모양세가 심히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다행히 제향자의 本孫 兩家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物力을 내어 놓아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를 진행할 幹事를 선출하였다. 이때 都監은 黃瞻漢·李獻淳·黃瞻漢으로 정해졌는데, 황첨한에게 사고가 발생해 朴必淳이 대신하였다. 그 외 都辦은 郭師樞가 맡았으며, 運材董役有司의 경우 西部에서는 黃宗幹·黃勉幹·黃得漢, 東部에서는 李彙璉, 東村에서는 李東?·權錫五, 生峴에서는 李元純, 龍洞에서는 하필청·南景祚·黃中立, 魯村에서는 蔡周翰·朴處仁이 각각 맡았다. 2월 19일 丁丑 丑時에 開基하기로 날을 정했으며, 定礎은 30일 戊申 辰時, 立棟은 3월 초8일 丙辰 辰時, 上樑은 17일 乙丑 申時, 造門은 4월 초8일 乙酉 丑時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날짜를 정했다는 기사 다음에는 黃泗源이 작성한 開基祝文과 黃龍漢이 작성한 上樑文이 수록되어 있다. 개기축문에서 황사원백고리사 건립 이후 강당이 없어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제향자의 후손이 물력을 모아 강당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 의의와 공적을 칭송해 놓았다. 상량문에서는 우선 곽진안덕린의 행적과 학문을 칭송하였으며, 그들로 인해 풍기군 지역에 교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아울러 사림에 의해 백고리사가 건립되었고, 후손들의 도움과 욱양서원 사림의 발의로 강당 공사가 진행되게 된 경위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상량문 다음에는 이해 8월 廚所를 落成하였으나, 아직 물력이 부족한 관계로 공사를 중지했다고 한다. 대신 해를 기다렸다가 물력이 모여지면 공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祠宇의 운영과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백고리사의 경우 강당을 건립하는데 있어, 사림의 공론에 의거해 진행됨이 나타난다. 또한 공사 과정에서 소요되는 물력은 제향자 후손들에 의해 마련된 사실이 주목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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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丙寅正月初四日郁陽書院歲謁堂會僉議以爲本
社立祠已多年所而講堂尙未就焉於尊奉之地殊甚
沒樣今幸本孫兩家至誠營蓄物力稍成可以及是興役
矣於是分定幹事諸員都監黃瞻漢李獻淳黃瞻漢
有故以朴必淳代之都辦郭師樞運材董役有司西部黃宗幹黃勉幹

得漢東部李彙璉東村李東?權錫五生峴李元純龍洞
河必淸南景祚黃中立魯村蔡周翰朴處仁
擇日開基二月十九日丁酉丑時定礎三十日戊申辰時立棟三
月初八日丙辰辰時上樑十七日乙丑申時造門四月初八日乙酉丑時
開基祝文黃泗源
伏以理有循環地有顯晦桑梓遺墟俎豆是揭若神有相有天與
基建廟置堂學序通規邇來卄載草創未遑于何講肄于何齊
明是懼是?爰謀爰始鳩材擧?啓龜相土厥土白壤厥位面
陽宗祖白崇襟帶川洋神護鬼持時値運回坊稱翰林宮又學
開豈惟人謀寔籍冥佑測影啓基圖終愼始惟神充篤永錫
我休齊?誠敢告厥由
上樑文黃龍漢
雲洞?西錦水南流有曰白皐里社用器?豆魯人縫掖允玆靑
衿儒宮稽先生沒而祭之文宜?士攝齊升之地恭惟崇賢尙敎而
黨序作建廟爲堂而宮室治朝家學政之所聽院宇成規之可眠
念玆區丹谷老逍遙隱者遂?食沙村翁左右享之等白鹿之高
風更看草野朱雲之劒故門之源派請徵衍?賈公之疏溝壑之
深心隔晨辛夷杖苦竹??夫傳鄕國之流風接壤竹溪氏文貞
孫故家遺今溪山不老於百年小白之紫氣??幾周旋曠感於東者
基野之翠微浸浸屬廟宇營創之辰?塗??之粗擧士無餘力
肆堂構經紀之議歲年時月之屢回工乃試功鳩金鐵幹當者有

道孫賢掌工徒作治則康成鄕彦疏捧莽受礎?之武增恢審廉
隅?方圓門路偕正夾頭明?當齋房翼舍之居休開中?檻容
肆夏采齊之趨步匠隷昏力趨析民之未殷衿紳趨??社燕而同
賀??陛級之有截隱約廟貌之增嚴大小殊名爲學則一也?狹
隨制有堂而翼如?前脩之不可攀幸玆文章氣節之未墜也庶
後生之興於是益思道義忠孝之賦於天如希賢希聖之事要自
請書敢謂之高遠迪四術四敎之方勉在洞主毋曰我匪人?古老
古稱秀才之材豈基鄕不作之國玆憑六偉之頌爰?不?
之章抛樑東丹穴微茫鳳去桐媚學齋邊人不見橫空曙靄爲
誰紅抛樑西兜率峰崇天與齊認得巖巖常不動興雲吐霧杳
無倪抛樑北郁陽祠下錦流直無人更去覓眞源古匣朱書?
食墨抛樑南平郊驛路遠無堪古來多少迷津者苦把微行大
道請抛樑上灝氣澄然一色曠縱有凌空嚥瀣人去?滅沒莫
無狀抛樑下笭?踏車織路野要識士爲首四民樊須終是
志卑者伏願上樑之後?齋有實梗楠生材閭閻通絃誦之聲
何勞孟母徙舍氷玉無鞠草之日不待曾俠踵來一區之雲烟自
滋百代之文敎永壽
是年八月日落成廚所則力綿事鉅姑爲停止以爲蓄力待年之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