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 慶尙道 豊基郡의 白皐里社 이건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789년(정조 13) 慶尙道 豊基郡에 소재했던 白皐里社의 移建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로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는 풍기군 출신의 유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789년의 백고리사 이건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1789년 7월 초1일 廟宇가 기울고 지세가 불편해, 본소에서 의논하여 이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社長은 黃最源, 齋任은 郭師楷·黃心源이었으며, 수십 여원의 회원이 모였다. 이건 장소는 西部 古老村에 위치한 곽진의 舊墟로 정했다. 이에 廚舍 13칸을 매입하고, 成造都監으로 蔡如沈·朴成觀, 運材瓦有司로 權應赫·黃必幹·黃鎭漢·黃心漢, 借軍丁有司로 黃起源·黃瞻漢·柳相虎·黃勉幹·李東?을 각각 임명하였다. 木手는 順興都護府 사람 鄭信國이 맡았다.
초10일 開基祭를 거행했는데, 당시 獻官은 李師孟, 祝은 郭師樑었다. 그러나 비가 내려 齊會하지는 못하였고, 대신 11일에 향원이 모였다. 地師 權白雲이 정중하게 위치를 子向과 癸坐로 정하였다. 12일 오후에 移安하는 일로 15~16원이 옛 사우에 모였고, 13일 午時에 告廟하였다. 당시 헌관은 사장, 執禮는 黃欽大, 축은 黃昇漢, 奉位版은 南衡度·韓德峻이 각각 맡았다. 회원 40여 원이 위판을 新社에 陪來해 와서 權安하였다. 앞서 도감 채여침이 呈單하여 새로운 도감으로 黃泗源을 선발하였다. 이 기사 뒤에는 이날 올려 진 開基祝文을 수록하였는데, 작성자는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 후 도감 두 사람이 함께 모여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혹 교대로 오가며 한 편으로 목재 운반을 돌보고, 한편으로 터를 닦는 것을 살펴보았다. 軍丁은 本洞과 다른 동리의 人丁으로 연일 서로 이어가며 使役하였다. 또한 毘盧寺와 聖泉寺의 僧軍을 借役하였다.
8월 풍기향교에서 재회할 때 백고리사 이건 건으로 먼저 榮川郡과 순흥도호부에 통문을 보냈다. 두 고을은 곽진이 평소 머물고 쉬던 곳이다. 또한 上樑文을 參判 吳大益에게 청하였다. 7월 25일 立柱하였으며, 8월 12일에 上樑하였다. 그리고 雲巖居士 오대익이 쓴 상량문을 수록해 놓았다. 상량문에는 곽진의 행적과 학문을 칭송해 놓았으며, 이건 경위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10월 초에 비로소 기와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날씨가 추워져서 공사를 정지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우의 운영 양상과 인적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