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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789년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789.4721-20180630.Y182190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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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백고리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작성시기 1789
형태사항 크기: 24.5 X 25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789년 기사
1789년(정조 13)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에 소재했던 백고리사(白皐里社)의 이건(移建)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로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의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4책의 잡록이 전하는데, 다른 잡록과 달리 이것은 백고리사 측에서 기록한 것이다. 1789년 기사에는 백고리사의 이건 사유와 과정, 이건 공사를 주도한 도감(都監)·유사(有司)·목수(木手)의 명단, 이건 과정에서 작성된 개기축문(開基祝文)과 상량문(上樑文) 등이 언급되어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789 慶尙道 豊基郡白皐里社 이건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789년(정조 13) 慶尙道 豊基郡에 소재했던 白皐里社의 移建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로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풍기군 출신의 유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789년의 백고리사 이건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1789년 7월 초1일 廟宇가 기울고 지세가 불편해, 본소에서 의논하여 이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社長은 黃最源, 齋任은 郭師楷·黃心源이었으며, 수십 여원의 회원이 모였다. 이건 장소는 西部 古老村에 위치한 곽진의 舊墟로 정했다. 이에 廚舍 13칸을 매입하고, 成造都監으로 蔡如沈·朴成觀, 運材瓦有司로 權應赫·黃必幹·黃鎭漢·黃心漢, 借軍丁有司로 黃起源·黃瞻漢·柳相虎·黃勉幹·李東?을 각각 임명하였다. 木手는 順興都護府 사람 鄭信國이 맡았다.
초10일 開基祭를 거행했는데, 당시 獻官은 李師孟, 祝은 郭師樑었다. 그러나 비가 내려 齊會하지는 못하였고, 대신 11일에 향원이 모였다. 地師 權白雲이 정중하게 위치를 子向과 癸坐로 정하였다. 12일 오후에 移安하는 일로 15~16원이 옛 사우에 모였고, 13일 午時에 告廟하였다. 당시 헌관은 사장, 執禮는 黃欽大, 축은 黃昇漢, 奉位版은 南衡度·韓德峻이 각각 맡았다. 회원 40여 원이 위판을 新社에 陪來해 와서 權安하였다. 앞서 도감 채여침이 呈單하여 새로운 도감으로 黃泗源을 선발하였다. 이 기사 뒤에는 이날 올려 진 開基祝文을 수록하였는데, 작성자는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 후 도감 두 사람이 함께 모여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혹 교대로 오가며 한 편으로 목재 운반을 돌보고, 한편으로 터를 닦는 것을 살펴보았다. 軍丁은 本洞과 다른 동리의 人丁으로 연일 서로 이어가며 使役하였다. 또한 毘盧寺聖泉寺의 僧軍을 借役하였다.
8월 풍기향교에서 재회할 때 백고리사 이건 건으로 먼저 榮川郡순흥도호부에 통문을 보냈다. 두 고을은 곽진이 평소 머물고 쉬던 곳이다. 또한 上樑文을 參判 吳大益에게 청하였다. 7월 25일 立柱하였으며, 8월 12일에 上樑하였다. 그리고 雲巖居士 오대익이 쓴 상량문을 수록해 놓았다. 상량문에는 곽진의 행적과 학문을 칭송해 놓았으며, 이건 경위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10월 초에 비로소 기와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날씨가 추워져서 공사를 정지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우의 운영 양상과 인적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己酉七月初一日以廟宇之傾側地勢之不便議定移建
聚會于本所社長黃最源齋任郭師楷黃心源
員數十餘員卜基于西部古老村先生舊墟買得廚

舍十三間定出成造都監二員蔡如沈朴成觀運材瓦
有司權應赫黃必幹黃鎭漢黃心漢借軍丁有司
黃起源黃瞻漢柳相虎黃勉幹李東?木手則
鄭信國初十日開基祭土地神獻官李師孟
師樑
以雨戱不得齊會十一日鄕員左右齊會地師
權白雲儼定向子坐分金入癸云十二日以移安事午
後十五六員會宿舊社十三日午時告廟移安獻
官社長執禮黃欽大黃昇漢奉位版南衡度
德峻
會員四十餘員陪來權安于新社草堂都監蔡如
前期來參朴成觀呈單改薦圈出黃泗源
開基祝文
維年月日朔某官某敢昭告于土地之神維玆一畝郭氏攸
築扶輿孕秀降我丹谷丹谷有樹其文郁郁爰有廟享于
彼窮麓爲父尊敬方謀改卜幾年易主故墟來復神其有
相理不終縮庭畔翠松杖?餘馥於斯享之允宜非瀆當日
名園居然黨塾始事攻位日吉神穀神庶惠佑賚我齊
?尙饗
其後都監兩員俱會看役或遞相來往一邊運材治木一邊拓
基地正軍丁則本洞及他里人丁連日相繼使役且地正時借役

毗{田+盧}聖泉兩寺僧軍八月鄕校齋會時以本社移建事先
發通于兩邑爲先生杖?之所憩也且爲請上樑文使儒
生齎幣送吳參判大益客所請文而來
七月二十五日立柱八月十二日上樑
上樑文
聞其風而興百世之相感彌切徵於典而準多士之殷
禮載將爰因和鶴之同聲聿覩靈龜之移食仰
惟山川間氣實?天地偉人忠孝固根於天資進
退何論踐履惟篤於地步終始可觀養志躬耕不忘憂
國之?存誠樂育克勤?後之方一尺短章朱雲之
白刃不死半畝荒經陶令之黃菊猶存行藏自有一
時其孰能與君親本無二致賢者全之隻字爲?
陰之陽天理有在片言爲頹波之柱輿情所公百行由本
源擴來一生將外慕擔去特立氣節見鐵壁於千
尋餘事文章搜日星於萬象遺形友鹿不能者人
所能者天開口?鳳有道則見無道則隱?麗澤
奚止於蒼石所淵源有自於陶山潑乎鳶魚益
深天淵之造果哉阿軸猶樂友朋之來濁世完名愛
憎無間於推服窮林節義顯晦實關於挽回嗟風

猷之已遙豈矜式之無所雖歲序寢遠邈矣及門
之徒伊秉?所同洽乎祭社之議百代儒院非無
報食之縟儀一區靈泉尙歎處地之僻陋爰就設
禮陳俎之地用申濯漢曝陽之思坊名西部緬懷
出處村以古老相傳至今傲雪凌霜百年之手植猶
在飛彙?竹一朝之棟宇奄新降斯妥斯人情倍
切於興感廢也興也物理何足乎深嗟西林之感轉新
遺芬未沫北斗之瞻滋久盛德難忘玆將俎豆之舊儀
益闡宮墻之新制平臨流水如聞在川之歎旁睡?
原遙想耕野之樂美矣合矣亦關風?乎環區藏
焉修焉?若從容乎函丈敢摹君子之容德恭獻兒
郞之頌謠
兒郞偉抛樑東萬?嵬嵬鶴祖雄當年五老誅奸筆
移?晴昊向日紅
兒郞偉抛樑南一道長川碧於藍爲是詞源流不息
萬言眞與二儀參
兒郞偉抛樑西滿郊烟雨夕陽迷千年更理尋眞
夢兜率峯連鶴駕低
兒郞偉抛樑北小白蒼蒼天一握卓?平生不平氣結
爲高山鎭斗極

兒郞偉抛樑上玉宇高處日星朗如此光明好心事百
代令人共瞻仰
兒郞偉抛樑下絃誦洋洋秋又夏他時一方儒敎尊奠
是先生去後化
伏願上樑之後斯文增重絶學丕興充火燃泉達之
端愼括囊茅征之會永托高山之仰留霑時雨之

上之十三年己酉八月十二日雲巖居士福川吳大益京城人官參判
十月初間始得蓋瓦以日寒停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