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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43년 「계묘8월초7일향교대향시발문(癸卯八月初七日鄕校大享時發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843.4721-20180630.Y1821907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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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백고리사,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작성시기 1843
형태사항 크기: 24.5 X 25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843년 「계묘8월초7일향교대향시발문(癸卯八月初七日鄕校大享時發文)」
1843년(헌종 9) 8월 초7일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풍기향교(豊基鄕校) 측이 백고리사(白皐里社)에 대한 부조(扶助)를 요청하고자, 고을 내 각 문중에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풍기향교 소장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4책의 잡록이 전하는데, 다른 잡록과 달리 이것은 백고리사 측에서 기록한 것이다. 백고리사단곡(丹谷) 곽진(郭??)[1568~1633]과 사촌(沙村) 안덕린(安德麟)[15631609]을 제향(祭享)하기 위하여 1786년 12월 풍기군에 설립된 사우(祠宇)이다.
통문에는 백고리사의 재정이 열악해 고을 사림들에게 부조를 요청하고자 풍기향교 측에서 발급한 것이다. 당시 백고리사는 향례(享禮)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는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을 내 각 문중에 돈을 배정하여, 부조를 요청하는 본 통문을 발급하였다. 이러한 사림의 부조는 조선후기 사우(祠宇)의 경제적 기반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43년 8월 초7일 慶尙道 豊基郡豊基鄕校 측이 고을 내 각 문중에 白皐里社에 대한 扶助를 요청하기 위하여 발급한 通文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843년(헌종 9) 8월 초7일 慶尙道 豊基郡豊基鄕校 측이 享禮 때 발급한 通文이다. 이 통문은 풍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白皐里社의 것이다. 백고리사丹谷 郭??[1568~1633]과 沙村 安德麟[15631609]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통문은 백고리사에 대한 扶助를 고을 내 각 문중에 요청하고자 발급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통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백고리사의 單薄과 凋殘을 一鄕이 모두 보고 안타까워하는 바라고 하였다. 거기다 근년 이래 백고리사의 蕩敗함은 더욱 심해져, 봄과 가을 향례 때 ?薦하는 비용도 辦備할 것이 없는 사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原任 李彙章黃憲周가 금번 풍기향교 齋中에 편지를 보내어 백고리사에 부조하자고 건의하였으며, 이에 生峴의 鄕長老에게 아뢰니, 그도 그 뜻에 동조했다고 한다. 그 결과 부조 방법을 논의하여 各所에 부조할 돈을 분배한 다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各所 가운데서는 조잔한 곳이 적지 않아 넉넉히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사정이었기에, 차차 실효가 있기를 기대한다며 도움을 요청해 놓았다.
통문 다음에는 이때 부조 받은 돈의 액수와 사용처를 부기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풍기향교 4냥, 郁陽 2냥, 愚谷 2냥, 魯溪 1냥, 그 외 각 문중에서 30냥 3전을 보내온 것으로 나타난다. 단 우곡 아래에는 ‘未捧’이라고 부기되어, 우곡으로부터는 분배한 돈을 부조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도합 37냥 3전을 부조 받았는데, 26냥 3전은 본소에서 사용하고, 남은 11냥은 이자를 놓아 1845년 정월 歲謁 때 15냥 3전으로 증식하였다. 한편, 忠淸道 忠州 鯉湖의 안씨 문중에서도 1844년 12월 23일에 부조 돈 28냥을 보내왔다. 이들은 백고리사 제향자 안덕린의 후손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우의 경제적 기반 가운데 부조의 사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사우의 대표적인 경제적 기반으로는 전답과 노비가 있다. 하지만 사우의 재정이 열악해질 경우 관의 지원이나 사림의 부조를 받기도 하였다. 백고리사의 경우 열악한 재정으로 향례를 제대로 거행할 수 없게 되자, 제향자의 후손과 고을 유림들에게 부조를 받아 충당하였으며, 남은 돈으로는 殖利를 통해 증식하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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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癸卯八月初七日鄕校大享時發文
云云白皐社之單薄凋殘一鄕之所共觀
而所苦優憫者也不幸近年以來蕩敗
尤極春秋?薦之供無以辦備矣數
處原任李彙章黃憲周裁書於今番齋
中蓋欲有相扶之道也以此意告于
鄕長老則亦善其意而使之自書中
施行故爛?商確爲先分排於各所而
目今各所無不凋殘則亦此難於優助而
期見實效也自會中有各門中?力
相助之議故玆以通告
鄕校四兩
郁陽二兩
愚谷二兩【未捧】
魯溪一兩
各門中三十兩三?
都合三十七兩三?內二十六兩三?本所用
在錢十一兩乙巳正月歲謁時幷利捧十五兩三?

忠州鯉湖安氏門中扶助錢二十八兩甲辰十二月二十三日來